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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고 공부한 게 한국사

공기업 취업할 거니? 아니요, 잘 살아보려는 건데요.

by 이하늘

광고 회사를 관두기 전부터 꿈꿔온 버킷리스트 중 가장 뜬금없는 걸 고르라면 아무래도 한국사 공부다.

경기 침체로 줄어드는 광고 프로젝트를 보며 고용 불안이라도 느꼈나 싶지만, 그건 아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별거 없다. 잘 살아 보려고.


내가 발 디디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 피곤하다며 피해 온 뉴스를 다시 챙겨 봤다. 수많은 기사와 가십에 휘둘리지 않고 나름대로 바르게 판단 보려고 더 다양한 책도 읽었다.

그렇게 뉴스, 책, 연설 등을 접하다 좀 더 관심이 가는 글에서 공통점을 찾았다.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 필요할 때는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주로 현재와 비슷한 상황의 옛이야기를 통해 상대가 스스로 깨닫게 한다. 정말 우아하면서도 효과적인 소통 방법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에겐 효과가 없었다. 왜? 내가 역사를 잘 모른다. 역사를 겉핥기로만 알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부정한다고 내가 똑똑해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잖아'라고 하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은은하게 미소 짓는다. 눈치껏 호응하면서 입을 다물고, 저 사람이 하는 말이 맞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조용히 머리를 굴리는 내 모습이 참 없어 보였다. 어설프게 깊이 있는 척하는 사람의 밑천이 드러난 기분.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난 빈 수레가 부끄러워서 조용히 살았다.

사람의 깊이, 뚝심, 줏대. 불안정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 앎에서 오지! 그래서 한국사를 배우기로 했다.




우선 현대와 가장 밀접한 근현대사를 공부하기로 했다. 그런데 근현대사를 깊이 이해하려면 엮여있는 조선을 알아야 하고, 조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려, 남북국시대, 삼국시대를 알아야 하고...

당연하지만, 하나를 이해하려면 그전 역사를 알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니 자꾸 흐름이 끊겨서 골치 아팠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게 빠르겠네...'

그렇게 꿍얼대면서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러게. 그러는 게 낫겠는데?'

해결 방법은 언제나 단순하다.

'그래, 그냥 처음부터 다 공부하자! 그리고 한국사 시험까지 보지 뭐. 단기 목표가 있으면 더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력서에 뜬금없이 한국사 인증서 한 줄 있으면 멋있고 재밌을 것 같은데?'

그렇게 나는 갑자기 한국사 수험생으로 돌변했다.




약 한 달간 매일 6~7시간씩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 오래간만에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아주 개운했다. 좋아서 한 공부이다 보니 힘들지 않았다. 배우면 배울수록 재미있었고, 모르는 게 나오면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더 알게 돼서 좋았다. 일하다가 딴짓하는 게 그렇게 재밌는데, 퇴사하고 생뚱맞은 공부를 하니 도파민이 철철 흘러넘쳤다. 계속 창의력과 응용력을 요구하는 일을 하다가 자료를 암기하고 즐기는 시간을 갖게 되니 이토록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기존에 하던 일인 카피라이팅은 주로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는 편이었다. 슬프지만 10시간을 투자한다고 해서 10시간만큼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매번 내 아이디어를 판다는 보장도 없고,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보니 어떨 때는 광고를 다 만들고도 온에어하지 못한다. 결과가 항상 좋지만은 않다.

하지만 역사 공부는 내가 노력한 만큼 확실한 결과가 보장된다. 암기하면 암기한 대로 내 것이 되는, 1+1이 2가 되는 당연한 일상! 너무 오랜만이었다. 역시 뭐든 그 소중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잠시 거리를 뒀다가 좁힐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을 땄다. 악!!! 1급을 것도 기뻤지만, 온전히 내 것인 지식을 얻고, 설정한 목표를 이뤘다는 게 정말 기뻤다. 덤으로 콘텐츠를 더 깊이 즐길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 역사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을 볼 때도 한국사 지식은 빛을 발했다. 거란이 쳐들어서 자칫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데, 지방의 실세인 호족들은 중앙 정권에 비협조적이다. 드라마에선 그 이유를 세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지만, 한국사를 배우고 나니 드라마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와, 예전의 나라면 그냥 드라마 흐름에 몸을 맡기고 멍하니 시청했을 텐데, 이젠 역사 드라마를 이해하고 있다니! '드라마 잘 이해려고 한국사 공부한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건 같은 걸 봐도 남들만큼 즐기지 못한다는 거니까.

그리고 일 원했던 건 바로 역사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눈치 보며 어색하게 웃음 짓던 지난날 인사하는 것! 이제 나도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역사 농담에 웃고, 연설을 듣다가 멋진 역사적 비유에 감동받 수 있다. 역사 분쟁 뉴스에 더 깊이 화내고, 일상 속 고민에 대한 답을 역사에서 찾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너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부족했던 난 이렇게 원했던 목표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잘 받아들이고, 잘 살 수 있는 사람.



퇴사하고 한국사를 공부했다는 건 참 생뚱맞아 보이는 일이긴 하다. 시간이 남아도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고 짧은 목표가 있으니까. 내 삶은 아주 길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단기 목표는 한국사 공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했다. 이전에는 당장 일이 너무 바빠서, 넘치는 콘텐츠에 정신이 팔려서, 그 외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이유로 언제나 일 순위 단기 목표는 '푹 쉬기'였다. 회사를 관두고 '푹 쉬기'를 이루고 나니,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간 미뤄온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이 여유를 보내 보려고 한다. 한국사 공부만큼이나 생뚱맞은 목표를 찾아 즐길 수 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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