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sworth처럼 심장이 떨어지는 순간.
20131001 Morning Page
감기가 걸리긴 했지만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경복궁에 왔다.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타고 싶었다. 읽을 책도 없었으니까. 브래드 멜다우를 들으면서 장시간 버스 라이드를 하는 거야.
401번 버스를 타고 광화문 역 바로 전 정거장에 내려서 경복궁에 들어가려 했더니 매주 화요일은 휴관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제는 휴관일에 도서관에 가더니. 오늘은 경복궁이 휴관일이라니. 휴관일 탐지기라도 되는 것이냐.
그래서 우선은 넓은 하늘이라도 볼 수 있게 주차장 입구로 들어갔다. 회색의 북한산과 드넓은 하늘, 그리고 여러 번 와 보았지만 이름은 모르는 곳들을 덮고 있는 기와지붕. 어느 지겹고도 지루한 연휴 중 하루, 탈출하듯 집에서 뛰쳐 나와 도착했던 경복궁에서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래, 이걸로도 충분하다.
경복궁이 휴관이니 색이 바래긴 했지만 예전에 좋아했던 삼청동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경복궁 담길을 따라 올라가다 벚꽃잎이 날리던 날, 또는 은행잎이 찬란한 노란색으로 물든 날 친구와 함께 필름을 잔뜩 사가지고 경복궁과 삼청동으로 사진을 찍으러 왔던 일들이 생각났다.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돌아다닌 것과는 달리 걷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던 사람과 이 곳에 왔던 날도. 나와 그는 엄연히 다른 영역 안에 존재하는데도 한 시도 빠짐없이 한 영혼, 한 생각으로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래서 같이 있는 것이 힘들었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각자의 생각과 세계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는 것이고 혼자만의 시간은 이렇게도 좋은데. 내가 그에게 끝없고 확고한 connection을 원하고 그 연결이 끊어진 것 같아 실망하고 힘겨워하며 무거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그의 세계에 대한 침범(violation)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도 지금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건너고 있는 나처럼 혼자만의 공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있었기를 바란다.
나는 혼자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고등학교 때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와,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음악을 들으며 긴 밤을 이야기로 채우던 동생과 함께 왔던 북촌 칼국수 집이 보였다. 점심은 저곳에서 따뜻한 칼국수를 먹을까 생각하다가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서 정독도서관에서 마음이 가는 대로 글씨를 적어 넣어보기로 했다.
잔디밭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쓴다. 예전에도 '정독'이라는 이름이 좋아서 항상 와 보고 싶었는데 삼청동에 그렇게 많이 오면서도 한 번도 들르지 못했다. 항상 친구들과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거나 수제비, 단팥죽을 먹으러 왔으니 도서관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생각은 못했다.
루시드 폴의 "삼청동" 때문인지, 이곳에는 나일론 기타 소리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의 곡목들을 뒤적이다 보니 이영훈이 있어서 "나를 기억할까"부터 재생했다. 머리를 살짝 간지럽히는 바람과 나일론 기타 소리, 남녀의 화성이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글씨를 쓰고 있는 노트 위로 따뜻하고 밝은 햇살이 내리쬔다. 그림자는 선명해지고 등은 따뜻하다. 바람에 실려오는 풀내음이 내 몸속으로 스며든다. 바닥에서 흔들리는 그림자가 나무들도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어떤 조명 효과보다도 아름답다. 이내 구름이 해를 가리고 나의 손 그림자가 희미해진다. 만년필 촉에 비친 반사광은 그림자 옆을 따라다닌다. 햇볕과 그림자의 반짝임과 어둠이, 마치 그들도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이영훈의 아르페지오를 따라 dim in, dim out을 반복한다. "웃고 있는 너와 절벽 위의 나"라는 알 듯 말 듯한 구절이 어지럽게 공간 속으로 흩어진다.
이렇게 밖에 나와 바람과 햇살과 풀내음과 그림자 속에 있다 보니 그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장면 속에서도 신기한 것들을 발견하고 어른이 되어 세상에서 별 것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감탄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까치들이 너두나도 울며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날아다니더니 교회의 옥상 쪽에서 많은 까치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아이들은 아침 햇살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그 장면을 놓치기 싫어서 이리저리 어지럽고도 바쁘게 날아다니는 까치들을 말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Wordsworth의 시에서 자신의 매일매일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지길 바란다는 구절이 생각났다.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W. Wordsworth, "My Heart Leaps Up" 중
자연이 흘러가는 한 순간에 몰입하는 아이들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지나가는 새 한 마리도, 집 근처 나무의 열매가 보랏빛이 되어버린 것도, 꽈리가 껍질에서 떨어져 풀더미 위에 놓인 것도, 바닥의 틈을 따라다니는 개미 한 마리도 그들에게는 소중하다. 아무것도 없어도, 지나가는 길목마다 인사하고 반가워하며 놀랄 일들이 지천에 가득하다. 어른이라면 그냥 모든 풍경들을 지나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을 느끼고 있었을 텐데 바로 옆의 작은 꽃잎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경외로움을 표현한다. 이것 봐! 예쁜 꽃이야! 이것 봐! 열매가 있어!
이런 마음이 진정한 "carpe diem"이 아닐까. 지금 지나가고 있는 순간을 억겁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곱씹거나 후회하거나 그리워하거나, 앞으로 어떻게 다가올지도 모를 미래에 대해서 골똘히 계획을 세우느라 어른들은 많은 시간을 놓쳐버린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시간을 놓쳐 왔다. 지금의 나도, 이 노트를 수놓고 있는 나뭇잎 그림자를 놓칠 뻔했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담아놓고 싶다는 것은 현재를 살지 못하는 나의 욕심일까. 곧 이 시간이 끝날 것이라는 아쉬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나가고 있는 시간이 아쉬운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오늘의 즐거움, 지금의 즐거움을 박제하여 소유하지 않으면 이러한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나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