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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Jun 05. 2018

A coming out party

고의적으로 빠트려온 내 이야기

Coming out
① 젊은 여성의 사교계 데뷔
②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밝힘
- Coming out party; 젊은 여성의 사교계 데뷔를 축하하는 파티


 내가 페미니즘을 접한 것은 강남역 살인사건 후였다. 당시 나는 이 사건이 여성 혐오 살인이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라서 죽었다”는 포스트잇도 이해되지 않았다. 나에겐 단순한 살인사건이었다. 그러나 나와 달리 우리 누나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누나는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고 얼마 후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사 왔다. 누나의 권유로 읽어본 이 책은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이 책은 계급적 사고에 따른 계급 불평등으로 세상을 봤던 나에게 젠더적 사고를 통한 젠더 불평등을 알려주었다. 페미니즘을 접한 후 나는 소수자와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더욱 노력했다.


강남역 살인 사건 후 붙여진 포스트잇 / 출처 : 뉴시스


 그렇게 나의 입장이 굳어졌다. “남자 페미니스트”, 나는 이 말을 싫어한다. 모든 사람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굳이 남녀를 가를 필요가 없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을 중심으로 모든 차별을 타파하자는 사상이고, 그 성차별의 대상이 여성과 소수자들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은 생존이다. 그러나 남성들에게는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당위다. 남성들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남성들은 여성과 소수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해서 유지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근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많은 특혜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 혐오로 논란이 된 남자 아이돌처럼 사과하고, 「82년생 김지영」 같은 페미니즘 책을 인스타그램에 인증하고, 페미니즘 게시글에 좋아요 누르고, 성차별에 반대한다며 해시태그를 하는 등의 것 이상이 필요하다. 바로 그들이 남성으로서 누려온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알게 모르게 저질러온 혐오와 폭력을 사과하고 참회하는 길이다.


 페미니즘 시각으로 글을 쓴 이후부터 나는 ‘여성들의 문제에 공감하는 남성’이라는 자기 위안을 경계해왔다. 그러나 사회는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폭력적으로 매도하는 것과 달리 페미니스트 남성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 여성 아이돌은 유명 여성 유튜버가 성폭력 경험을 발화하는 미투에 공감했다는 이유로 몰매를 맞았다. 그는 애써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적 차원에서 공감했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이 아이돌의 사형을 청원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한 여성 아이돌은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남성 팬들이 그 여 아이돌의 사진을 찢고 불태우며 항의했다. 이 책은 남성 대통령도 읽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항의하지 않는다. 나도 페미니즘 얘기를 했다고 해서 위협받은 일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리고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자기검열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생각을 드러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여성을 임질에 빗댄 방탄소년단(좌), 미투 와중에 침묵하고 있는 침묵하지 않겠다던 남자 연예인들(중앙), 수지의 사형 청원글(우) / 출처 : 디스패치, 그것이 알고싶다, 청와대

 그럴 때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나의 정체성을 숨기고, 여성들과 소수자들의 말을 가져다 쓰면서 깨어있는 남성으로 각인되기를 바란 게 아닐까. 난 고통받고 있지는 않지만, 난 깨어있으니까 차별받는 여성과 소수자들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위선.” 하지만 나는 한 발자국만 나서면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 나는 약자와 소수자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깨어있는 남성이 아니다. 내가 한 말은 여자들과 소수자들의 말을 빌려 쓴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나의 언어였다. 내가 글을 쓰고, 발언을 할 때마다 이것이 나를 짓눌렀다. 비겁하게 나의 기득권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소수자와 약자들을 지지한다는 죄책감이 항상 있었다.


 물론 커밍아웃을 망설이게 하는 점이 있다. 나의 다른 정체성들이 성적 지향에 가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 공부를 하는 학생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친구고 아들이고 동생이고 제자고 선후배다. 울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짜증내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사람인데 그 모든 나의 특징들이 성적 지향 하나에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도 많이 걱정되고 망설여진다. 그러나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밝힘으로써 떳떳한 사람이 되기 위해 커밍아웃을 한다. 제목처럼 내 커밍아웃은 기쁜 파티고 축하받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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