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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Oct 18. 2020

군대에서 쓴 편지

이병의 편지

 나는 지금 훈련소를 수료하고 자대에 온 지 나흘이 지났다. 아직 모친께 택배로 부탁한 핸드폰이 오지 않아서 주말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싸지방에서 지내고 있다. 싸지방에서 이것저것을 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SNS(사실상 트위터)에 접속해서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밀린 웹툰을 봤다. 네이버 웹툰은 두 가지밖에 보지 않아 금방 정주행을 마쳤다. 삼국지톡과 모죠의 일지다. 삼국지톡은 캐해석과 미인들 눈빛이,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선이 일품이다. 많이 유명해서 내가 추천하는 게 의미가 있을지 싶지만 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꼭 보길 바란다. 밀린 웹툰을 보고 뉴스를 읽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훈련소에서 친구에게 내가 이전에 쓴 보고서에서 인용한 학자 이름을 물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나는 보통 대학 리포트를 그 학기가 끝나고 브런치에 게재한다. 그렇지만 그 글은 게재하는 것을 까먹고 군대에 들어와서 친구도 찾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와서 입대 전 마지막 학기에 쓴 리포트 두 개를 올렸다. 알림이 하나와 있어서 들어가 보니 내가 쓴 글 랭킹 1위가 갱신되어 있었다. 그 글은 "내가 군대 가기 싫은 이유"였다. 예전에 쓴 글을 읽는 부끄러움과 함께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과, 왠지 모를 허탈감이 밀려왔다. 나는 그렇게 군대를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이렇게 있다.
 사실 나는 훈련소에서 격리 중에 퇴소를 고민했었다. 입대 전 2주 동안 평등버스를 타고 26개 도시를 돌았던 것을 그대로 적어 내니, 다른 입소자들과 달리 추가 격리를 당하게 되었다. (우스운 것은 나를 8.15 집회 참석자로 알고 있었다. 응급차를 운전하던 운전병이 초병에게 "전광훈" 뭐라 하는 것을 듣고 긴가민가 했지만 훈련소 중대장이 직접 나에게 8.15 집회 참석자냐고 물으면서 확실해졌다.) 처음에는 혼자라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곧 무기력함이 나를 덮쳤다. 격리실 너머로 들려오는 동기들의 훈련 소리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군대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켰다. 체온을 보고하라고 준 무전기에서는 나 말고 이리저리 바쁜 바깥의 소리가 들려왔다. 우울했다. 나는 그때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은 내 죽음뿐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신체적 증상도 드러났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이때는 한 시간에 한 번씩 깼다), 귀에 열이 오르고 좀처럼 식지 않았다.
 이 사실을 M하사에게 말하니 외진을 가서 훈련소를 퇴소하자고 했다. 거기서 나는 고민했다. 분명 이 증상들은 내가 군대에 와서, 더해서 격리를 당해 서일 텐데 내가 퇴소하고도 정신병으로 공익을 따낼 수 있을까 싶었다. 현역 판정률이 2013년에 90%에 육박하고, 전체 병사의 23.1%가 "보호관심병사"인 병역 시스템에서(https://www.yna.co.kr/view/AKR20140806130651043) 나는 그들의 기준에 알맞게 아플까 걱정되었다. 결국 그냥 남기로 했다. 얼마 후 격리가 해제되고 훈련소 동기와 함께 생활하니 우울감도, 신체적 증상도 나아졌다. 그때 마음을 다잡기 위하여 주문을 하나 만들었다. "이건 1년 반짜리 연극이다. 나는 군인 역할을 맡았다.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 주문을 외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자대에 오고 나서 다시 우울감과 불안감,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훈련소와 달리 자대는 정말 풀어지는 게 많았다. 더 이상 발을 맞춰 걷지 않아도 되고, 전우조 활동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청소도 정말 대충 한다. 그런 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군기가 심하다. 선임들 앞에서는 침도 뱉지 말아야 하고, 담배 연기도 안 보이게 뱉어야 한다. 또 만날 때마다 경례를 해야 하고, 양치를 하는 도중에는 입에 거품을 뱉고 왼손으로 칫솔을 들고 경례해야 한다. 선임이 계속 들어오더라도 말이다.

 훈련소와 비교했을 때, 내가 훈련소를 그리워할지는 몰랐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감정이 드는 것이 허탈하다. 나는 이제 내가 "돌아갈 곳"(친구들과 인권운동 동료들이 있는 곳)을 잊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꿈이 점점 작아지는 것은 정말이지 비참하다.
 각설하고 내가 어찌 되었건 훈련소를 그리워하게 된 것은 당연하게도 부대와 훈련소의 차이 때문이다. 훈련소는 보다 공적이고, 부대는 보다 사적이다. 공적 규범은 보다 항의하기가 쉬웠다. 복종하는 척하면서 내심 무시하는 게 쉬웠다. 하지만 사적 규범은 더 옥죄어 오는 느낌이다. 나는 이제 생활관 밖을 나서기 두렵다. 내가 얼굴도 모르는 선임을 그냥 지나쳐서, 나 때문에 내 동기들이 모여서 "닦"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것 때문에 군대에서 더욱 적대적인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이런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적었다.


 공적(이라고 여겨지는) 규범이 정지한 가운데 그 공백을 사적(이라고 여겨지는) 규범이 채운다. 규범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이곳 군대에서는 사적 규범이란 주로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공적 규범은 이러한 사적 폭력에 기대어 잠을 잔다. 이런 현상은 그 반대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매우 분명하고 치명적으로 그 공동체를, 공동체의 성원을 침체시킨다.
 잠자고 있는 공적 규범, 위계 체계는 전체의 위계에 대한 반란 혹은 그 미약한 조짐을 진압할 때, 혹은 더 상위의 규범에게 아부할 때만 행사된다. 전체 위계에 대한 반란이란 당연하게도 사적 규범에서부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다.
 고로, 일반 사병에서부터 대대장에 이르기까지, 내가 있는 이곳에서 군복을 입은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방식의 행위로 폭력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누군가는 침묵과 복종으로, 누군가는 행사로서, 누군가는 방관과 무관심으로 말이다.


나 또한 폭력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치욕스럽고, 비겁하게 느껴진다. 나는 내가 혐오하는 사람들과 비슷해질까 봐 걱정된다. 앞으로의 498일이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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