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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더하기 Mar 03. 2021

못다 핀 꽃 한송이

일요일 아침, 마치 오전 6시가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이 울린다.

“팀장님, 주무세요?”

“응, 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연구소 XXX씨가 어제 교통사고가 낫 데요.”

“그게 뭐?”

“장례식 참석여부 확인 할려고요.”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회사로 달려갔다.

빨리 준비한다고 했는데 내가 거의 막바지로 버스에 올라탔다.

그렇게 100여명의 직원이 버스 3대로 나눠 타고 식장인 충남 공주로 항했다.

연구소 XXX. 누구지?

이름도 처음 듣고 얼굴도 기억이 없다.


“그래 다들 왔구나. 담배 한 대 태우고 올라 갈테니 먼저들 들어가라.”


휴가중인 신대리를 빼고 모두 참석해 주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셔츠에 상의만 입고 있어 조금 추웠다.

추워서 그런지 담배가 맛나도록 빨린다.

식장안이 본사에서 내려온 우리 직원들로 인산인해다.

팀원들이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영정사진을 들여다봐도 누구인지 기억이 없다.

상복을 입은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이 멀뚱멀뚱 우릴 쳐다보고 서있다.

그의 나이 34이다.

두 아들의 나이 5살, 3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억지로 참았다.

자리에 앉아 육개장 국물을 뜨는데 5살이라던 그의 아들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는 모습을 보았다.

결국 눈시울이 빨개지고 주책없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주 앉아 있던 김차장도 따라 눈물을 흘리는가 싶더니 우리 팀원 모두가 훌쩍이고 있다.

모두 우리 팀을 쳐다본다.

시작이 나였으니 마무리도 내가 해야 한다.


“그만들 하자.”


그 순간 나는 왜 눈물이 흘렀을까?

떠난 그가 불쌍해서?

아니면 저 아이들의 앞날이 걱정돼서?

죽음의 허무함을 모를 내가 아닌데 왜 눈물이 흘렀을까?

죽음이 던지는 물음에 대해 대답이 궁색하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꼭 가까운 사람이어야만 가능한 게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나 먼저 나가서 담배 피우고 있는다.”


김차장이 뒤따라 나왔다.


“허무하네요”


내가 한참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날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과연 죽음은 무엇이 그리도 슬픈 걸까?

왜 우리는 죽음 앞에 한없이 약해지고 눈물이 흐를까?

그것은 아마도 이제 더 이상 고인을 마주하지 못한다는 슬픔일 것이다.

오늘 남겨진 자들의 슬픔 역시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슬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 오랜 시간을 머물지 않았다. 회사로 복귀한 시간은 오후 4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모두 고생했다. 일요일인데 내일처럼 달려와 줘서 고맙고. 어서들 들어가 좀 더 쉬고 내일 보자.”


그리고 홀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꺼이꺼이 한참을 울었다.

지금까지 내 생에 죽음으로 느낀 가장 슬픈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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