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 J. M. 데 바스콘셀로스
브라질은 소설 강국이다. 우리가 극히 일부만 접해서 그렇지 소설 분야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국가 중 하나다. 브라질 드라마를 '텔레 노벨라'라고 부르는데, 전파 소설이란 뜻이다. 그만큼 브라질 사람들에게 소설은 축구만큼이나 자부심이 대단한 분야이다.
개인적으로 번역된 책은 쉽게 찾지 않는 습관이 있다. 스스로도 아주 못된 버릇으로 생각하고 고치려 하는데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아무리 베스트셀러가 되고 주위에서 추천을 받아 읽어도 그 감흥이 가슴속에 새겨지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에 하나가 번역본은 원 작가의 감성이 아닌 번역 작가의 정서가 전달된다는 점이다.
혼자 생각으로 ‘아직도 못 본 국내 서적이 많아, 그거라도 제대로 읽어야 돼!’ 이렇게 치부하지만 내가 전공하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외국 서적을 찾아 읽는 건 많이 힘든 게 사실이다.
간혹 주변에서 ‘야 그럼 아예 원본을 읽어, 그렇게 잘났으면.’
그러나 내게 핑계일지 모르겠지만, 모든 세상의 책을 원본으로 볼 만한 능력과 시간이 없다. 이렇게 정신적 문제를 지닌 사나이 가슴에 멍울로 여울진 한 권의 외국 소설이 있으니 그 책이 바로 너무도 유명한 브라질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이다.
은근히 문학적 강국인 브라질의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책을 접하는 그 시절에 따라 감정이 각기 달라지는 묘한 소설이기도 하다.
혹시 어떤 책을 보고 슬픔을 느껴 보았는가? 여기 내가 뽑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주인공 제제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다섯 살 소년 제제는 너무나도 영리한 아이이다. 그리고 너무 일찍 철이든 아이다.
간혹 이런 제제에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몇몇 어른들에게 피해 아닌 피해를 주기도 하고 그로 인해 제제는 혼이 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주인공 제제는 다섯 살 어린 소년이다. 과연 다섯 살이라는 물리적 나이 때에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책을 읽어 보셨거나 앞으로 읽을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런 생각과 행동이 가능할까? 의구심을 표현할 만큼 제제는 놀라운 아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책 속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의 장면이다.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선물을 줄 수 없는 불쌍한 아버지. 그 불쌍한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구두닦이 통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제제의 행동은 갸륵한 미소가 절로 나오게 한다.
가난하면 반드시 슬프지만은 않다. 하지만 가난을 극복하는 과정은 분명 슬픈 일이다. 이렇게 가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소설을 무수히 많다. 문제는 이런 가난과 역경을 극복한 후에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성공과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너무 어린 주인공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지만 그 끝에 행복의 길이 열리지 않는 매우 우울한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가히 상쾌하지 않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 전개된다. 1부는 제제를 통한 그 주변 환경에 대한 슬픔을 전달하고 2부는 어린 제제의 슬픔 그대로를 전달한다.
이 책을 통해 난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울지 마 제제!! 너로 인해 많은 세상 사람이 행복하고, 넌 누구에게나 기쁨과 슬픔을 전할 줄 아는 힘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