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 조세희
독후감을 쓰며 가장 망설여지게 된 작품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최인훈 선생님의 '광장'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 소개하는 조세희 선생님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전작은 이념적 갈등에 대한 고뇌를 후작은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에 대한 갈등을 골자로 한다. 두 작품 모두 문학적 가치야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은 아니다. 다만 섣부른 감상으로 귀한 작품에 오히려 흠을 낼까 두려웠을 뿐이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흔히 연작소설이라 불린다. 연작 소설을 내식대로 설명하면 이렇다. 한 작품 안에 여러 주제로 세분화되어 이야기가 흘러간다. 각 주제에 대한 내용은 별도의 줄거리를 가지며 독립적인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묶음으로 보면 연결되어 흘러가게 되고 등장인물 등도 연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까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편소설의 묶음 이 연작 소설인데 그 묶음은 전혀 별개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표적인 연작 소설은 이문구 선생님의 '관촌수필'과 양귀자 선생님의 '원미동 사람들' 등이 있다.
다시 본 소설의 이야기로 들어와 보자.
누구나 평등한 사회를 꿈꾸지만 모두가 평등하면 무너지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 가진 자와 가진 것이 없는 자,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 그리고 지키려는 자와 무너뜨리려는 자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도시 은강.
부모의 신분에 따라 이미 결정된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조선시대는 이미 오래전 이야기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우린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최고의 작품이 바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나와 같이 책을 너무도 좋아하는 주인공 영수의 노트에 다음과 같은 글들이 기록되어 있다.
'폭력이란 무엇일까?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도 폭력이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40년 넘게 대한민국에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경제 불황' 그리고 '정치 공약(空約)'이다. 데이터를 다루는 한 사람으로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사회에 참 그 절개가 황공무지하다. 내 소싯적에 '경제를 살립시다!'라는 코미디 프로가 존재했으니 현재 '서민경제'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명칭만 바뀌어 그 지조를 유지하고 계시는 경제 불황님의 높은 절개는 가히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몇 년 전 게 대 히트를 친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정치 공동체가 좋은 삶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공직의 분배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그것은 바로 시민의 미덕이 탁월한 사람, 공동선을 숙고하는 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부자도, 다수도, 가장 잘생긴 사람도 아닌 시민의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정치적으로 인정받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 현실에 존재하는 정치인을 위시한 지도자들 및 부유층에 면면은 어떠할까? 시민으로서 미덕이 탁월할까?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해 고민하고 있을까?
우리나라의 사교육비와 대학 등록금은 하늘 높을 줄 모른다. 이미 개천에서 용 날일 만무하고 돈 있는 사람만이 고등 교육을 받고 소위 말하는 학벌 관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곧 성공의 지름길이며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서의 하나에 미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더 무엇을 이야기를 하겠는가. 모두 아는 이 현실이고 보면 '경제 불황' 소리 한번 듣도 보도 못한 귀공자들이 자라 공부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 정치하고 이 나라 법 만들고 그중에 뽑아서 경제정책 책임자 시키고 하는 마당에, 언급한 경제 불황에 그 높은 절개는 수대 수천 년이 흘러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꼿꼿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정치건, 경제건, 철학이건 하다못해 정보화 건 그 속에는 서로가 지키고 위해줘야 할 도덕적 가치가 존재하고, 그 도덕적 가치는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절대 지존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본 소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다. 기회는 균등하게!! 자본주의에 살고 있으니 노력의 대가가 서로 엇갈린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어쩌면 받아들여야 할 가치 일지 모른다. 다만 그 노력의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1930년대 강경애 선생님의 '인간문제'라는 장편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당시 보기 드문(?) 여성 지식인이자 문인 이셨던 강경애 선생님의 작품이라는 것도 독특 하지만, 그 내용이 노동과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색다르다.
소설 '인간문제'는 전반부에서 농촌사회의 빈부를 통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인권 유린을 보여주게 되고 후반부에서 일제 강점기 노동자 계급 운동에 대해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본 소설과 강경애 선생님의 소설 '인간문제'는 그 형식이나 내용이 전혀 판이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게 전달되는 두 소설의 파장은 비슷한 느낌을 주게 된다. 어떤 형태로던 그 때나 본 소설이 쓰인 시대나, 아니 지금의 시대나 착취하고 억압하려는 것과 그것을 이겨내려는 것은 늘 존재해 왔다. 다만 대상과 환경과 세월만이 흘렀을 뿐이다.
두 아이가 동시에 굴뚝 청소를 했다. 이때 한 아이는 얼굴이 새카맣게 되어 내려오고, 또 다른 아이는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그러면 어떤 아이가 얼굴을 씻을까? 매우 단순하고 간단한 질문 같지만 많은 것을 고민하게 하는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얼굴이 더러워진 아이가 얼굴을 씻어야 당연하다. 하지만 얼굴이 더러워진 아이는 얼굴이 깨끗한 아이에 얼굴을 볼 것이며 자신도 저 아이와 같이 얼굴이 깨끗하다고 생각하여 씻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얼굴이 깨끗한 아이는 얼굴이 더러운 아이를 보고 자신도 저와 같을 것이라 판단하여 얼굴을 씻을 것이다.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얼굴이 더러워질 것이고 반대의 아이는 더욱 깨끗해질 것이다. 둘이 모두 똑같이 일을 했지만 한쪽은 빈곤의 연속이고 다른 한편은 부의 축적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두 아이가 모두 굴뚝 청소를 했다면 한 아이만 얼굴이 더러워져 내려오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둘 다 더럽거나 둘 다 깨끗해야 정상인 것이다. 우리가 똑같이 일을 했다면 그 결과는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본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공업도시 은강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노동력은 심하게 착취되고 인권은 유린되며 그에 따른 부에 배분은 공정하지 못하다. 하물며 노동자에게 줘야 할 임금까지도 기업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써야 하니 말이다. 우리 기업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줄 돈이 없지만 자신들의 이미지를 위해서는 기꺼이 돈을 내는 이 불편한 진실.
마지막으로 본 소설 특이한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본 소설은 그 인기만큼에 비해 짜임새는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한눈에 잡을 수 있지만 그 안에 흐르는 이야기는 여러 갈래의 시냇물처럼 흘러내린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한 시점에 이야기 속에서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등장하여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전개된다는 점이다. 지금 나누고 있는 이야기가 현재의 이야기 인지 과거의 회상에 대한 것인지 구분해서 꼭 읽을 필요는 없다. 어쩌면 느끼지 못하고 지나 칠 수도 있으니까.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은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소외된 계층의 생활상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아름답게(?) 이야기한다. 어쩌면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의 그 고단했던 역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흔히들 '우리가 너만 할 땐 말이야 ~' 말로만 듣던 그 광경을 글로서 체험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