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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더하기 Sep 14. 2019

글로써 아름다움을 보다

황진이 - 홍석중

보통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고민한다면, 나에 대답은 간단하다. 출판사에 걸린 베스트셀러를 찾고 그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서적을 고르면 된다. 책을 안 본다 하지만 우리처럼 책의 홍수에 살고 있기도 힘들다. 그러니 베스트셀러를 따라가기도 여간 만만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베스트셀러를 쫓는 방법도 있지만, 또 하나의 방법을 소개하자면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을 찾아 읽는 것이다. 물론 사견으로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반드시 재미와 감동을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대부분의 문학상 작품은 초보자가 접근하기에는 안드로메다와 같은 느낌을 선사할 때가 많다. 그런데 재미와 감동 그리고 긴 여운까지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을 선사한 문학상 작품이 있으니 북한 작가 홍석중 님이 쓴 [황진이]이다. (2005년 제19회 만해 문학상 수상작)

이 책, 황진이는 특이한 면이 있는데, 첫 번째는 처음 한 번 읽고는 그 맛을 느끼기에 부족하다는 점이다. 나 역시도 황진이를 두 번째 읽고 나서야 그 아름다움과 당돌함에 빠졌는데, 단박에 내 베스트셀러 목록에 상위권을 점령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이 소설이 북한 소설이라는 점이다. 북한 소설을 접하기란 나 같은 일반인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더욱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마지막은 책 속에서 황진이에 독백을 빌러 스스로의 심경을 반영하고 묘사한다는 점이다. 외람되게도 극에 흐름이나 재미에는 반감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소설은 허구이다. 이 책 역시 ‘놈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전면에 등장하는 허구의 소설이다. 책 속에서 놈이는 황진이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인물이며 소설 전체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황진이가 기생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 해 주는 인물도 놈이 이며, 콧대 높던 황진이가 자존심을 꺾은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하는 것도 ‘놈이‘이다. 이 책을 통해 나타나는 놈이와 황진이의 역학관계는 내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책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놈이와 황진이에 관계 설정만큼이나 송도류수 김희열과 황진이의 줄다리기는 이야기를 이끄는 또 하나의 축이다. 작가의 의도된 설정으로 보이는데 감히 소견을 들이자면 놈이와의 이야기보다 김희열과의 줄다리가가 조금 더 이야기에 중심으로 보인다. 

물론 위에 언급한 대로 황진이가 기생이 되는 계기와 기생의 생을 마감하는 열쇠를 진 인물로서는 놈이가 중요하다 하겠지만, 재미를 위한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두 사람의 줄다리기가 이끌어 간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소설 황진이를 소개해 보고 싶다. 북한 소설 황진이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역사 장편소설이다. 대부분의 역사소설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충실히 설명하며, 대부분의 실존했던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게 된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황진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기이며, 아름다운 시를 남긴 시인이며, 송도삼절의 하나라는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황진이가 기생이다 보니 가상인물인 주인공 놈이를 제외하고도 자연히 주변 남자들이 그녀의 삶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책 속에서는 큰 흐름으로 볼 때 4명의 남자가 그녀의 삶에 찾아오게 되는데, 먼저 희대의 스캔들 벽계수 이충남과의 인연이다. 자칭 당대 최고의 성인군자로 통하던 이충남과 절세가인 황진이에 극과 극 설정은 이 책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절묘하게 표현된다. 

친구인 송도류수 김희열에 초대를 받고 친구들과 송도에 방문한 이충남이 도학 군자를 들먹이며 풍류를 멀리 하자 김희열과 황진이가 서로 작당하여 그를 거꾸러트리는 내용이 주요 골자이다. 

이충남이 황진에 홀딱 반하여 속치마 자락에 정신없이 먹을 갈아 시를 쓰던 장면과 다음날 황진이가 기생이 되어 답가를 들려주던 장면은 몇 번을 말해도 명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장면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충분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다. 

이 장면에서 황진이가 이충남에게 들려주는 답가가 그 유명한 평시조 ‘벽계수 낙마 곡’ 즉 우리가 아는 ‘청산리 벽계수’이다.


靑山裡碧溪水(청산리 벽계수) 청산리 벽계수야

莫誇易移去(막과 이이 거) 수이감을 자랑 마라

一到滄海不復還(일도 창해 부복 환) 일도 창해 하면 돌아오지 못하나니

明月滿空山(명월 만공산) 명월이 만공산 한데

暫休且去若何(잠휴 저거이약하) 잠시 쉬어간들 어떠하리


너무나도 유명한 시조이다 보니 그 뜻을 모르는 사람 있을까 싶지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벽계수에게 성인군자처럼 도도하게 굴지 말고 명월이(황진이에 기명)와 함께 잠시 쉬어 가란 말이다.


소개되는 본 책을 차치하고도 몇몇 책에 나타난 화담 서경덕 선생의 인품은 실제로도 도학 군자다운 범접하기 힘든 인격인 듯싶다. 이 책에 나온 화담 선생은 그 경지에 종지부를 찍을 만하다.

큰 줄기로서 이 책 속에서 화담 선생과 황진이에 장면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짧은 만남으로도 황진이가 화담 선생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를 느끼기에는 새삼 부족함이 없다.

책에 소개되는 두 사람의 만남 역시 송도류수 김희열과 황진이에 농 짓거리에서 출발하게 된다. 벽계수야 자칭 도학 군자이지만, 화담 선생은 도학 군자로서의 명성으로 송도삼절에 들어가니 황진이에게는 도전 목표로서 더 이상이 없었다. 

이 부분에서의 백미는 황진이와 화담 선생이 좁은 방 안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장면이다. 도학 군자이니 방이 좁아 자신이 밖에서 잔다거나 황진이에게 이곳에서 자기 곤란하니 도로 내려가라 이를 줄 알았건만, 화담 선생은 아무 걱정이 없다는 듯이 황진이와 한 방에서 그것도 한 이 불속에서 잠을 청한다. 

이 장면에서 황진이는 부단히 도 화담 선생을 유혹한다. 결과는 당연히 황진이에 보기 좋은 패배이다. 하룻밤을 두고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와 진이가 화담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느끼는 대목은 물 흐르듯 부드럽다.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성곽과 문루는 무너져 모래가 되고

흐르는 물, 떠도는 구름만이 지는 노을 속에 붉게 타는구나

가던 길 멈추고 서성거리며

아득한 옛날의 자취를 더듬으니

박연과 함께 송도의 삼절이라

화담의 푸른 물 우에 명월이 함께 웃네


소개할 황진이와의 세 번째 인연은 지족암 생불로 통하는 지족선사(만석)이다. 

화장사의 젊은 중이던 만석이 우연히 들른 황진사댁에서 진이를 만나게 된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돌아서서는 처음 입적하던 화장사가 아닌 귀법사에 들었는데, 황진이에 대한 사욕을 쉽게 버리지 못하여 열반할 때까지 좌선을 하겠다고 과욕(?)을 부리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위에 소개한 두 사건만큼 짜릿함과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진이가 만석을 두 번, 그리니까 자신에 집에 들어 욕을 보는 만석을 구하는 일과 생불로 이용당하는 만석을 또 한 번 구하는 이야기이다. 

주된 흐름은 지족선사 만석을 구하는 장면인데 이 부분에서 황진이에 아름다움과 여장부로서의 과감함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다. 고려 말부터 부패하기 시작한 불교의 폐단과 타락을 황진이를 통해 보기 좋게 풍자하고, 유교와 불교의 극단적 대립 상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세 명의 주변인을 통해 황진이에 계교가 섞인 지혜와 학문적 깊이 그리고 그의 출중한 외모를 느낄 수 있었다면 마지막 주변인으로 소개할 김희열은 이런 황진이에 진, 선, 미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잠깐 언급한 대로 김희열과 황진이의 관계는 전편을 두고 흐르는 큰 줄기이다. 전반부 진이가 기생이 되는 과정과 마지막 진이가 기생질을 마치고 세월을 떠도는 장면을 제외하면 책 전반에 걸쳐 두 사람의 이야기가 흐름을 이끌어 간다. 

그중에서도 화적패가 된 놈이를 구하기 위해 김희열과 대립하는 황진이에 눈물겨운 모습이 책의 클라이맥스를 보여준다.

진이는 송도류수 김희열의 수청을 여러 차례 거부한다. 김희열 역시 그런 진이를 힘으로 거꾸러 뜨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결과론적으로 진이는 김희열에게 몸을 허락하게 되는데, 그전 상황에서 진이가 김희열에게 역정을 내고 돌아선 뒤라 그 느낌이 꽤나 서글프다. 

이때 김희열이 황진이와 거사를 치르고 기막힌 멘트를 날린다. 

“어리석은 계집이 방금 마신 우물에 침을 뱉는 게야. 뒤돌아서면 다시 목마를 걸 모르는 법이거든.” 

이 멘트 하나로 진이는 기생질을 마감하고 세월을 방황한다.


이 외에도 소설 황진이에서는 진이가 괴똥이와 몸종 이금이의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 등을 통해 당시의 풍습과 혼례상을 확인하게 되고 또한 당시의 고을 수령과 기생과의 상생관계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소설 전반에 걸쳐 틈틈이 소개되는 시구를 확인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소설 황진이를 읽다 보면 또 다른 송도 기생 설매에 대한 일화가 잠깐 등장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고려를 뒤집어엎은 이성계가 공신들을 수창궁에 불러서 연회를 차렸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기생들 중에 설매가 있었다. 

이성계의 바른(오른) 팔인 개국공신 배극렴이가 잔뜩 취해가지고 설매를 끌어안으며 자신 만만하게 뇌까렸다. ‘이년!, 너 오늘 밤 나한테 수청을 들어라. 기생 년들이란 로류장화(路柳牆花)라지? 오늘은 이가와 내일은 장가와 또 모레는 박가와... 그래서 네년들을 장삼리사(張三李四)라구 그런다지 않느냐? 그러니 오늘 네년이 나한테 수청을 든다고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으렷다?’ 

설매의 눈길이 살짝 험해졌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조용히 대답했다. 

‘대감께서 수청을 들라 시니 황공무지로소이다. 고려 왕 씨를 섬기시다 부잣집 소 바꾸듯 조선의 이 씨를 바꾸어 섬기시는 대감 이시온데 장삼리사를 옮겨 다니는 천기와 어울려서 무슨 도리에 어긋남이 있으리까?’ 

참 기막히고 대담무쌍한 우문현답 아닌가? 황진이 소설에서 다른 기생의 얘기를 하니 조금 뜬금없긴 하지만, 참 멋지게 글로 표현된 일화인 거 같아 오래 가슴에 남았다. 송도에는 황진이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인쇄된 활자를 보고도 사람의 미모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책!! 그 어떤 묘사 구로서가 아닌, 나는 글을 읽지만 황진이의 진정한 아름다움(미모)을 볼 수 있다. 홍석중 님의 황진이는 글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역사를 배우며, 우리가 아는 황진이에 또 다른 일생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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