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외에 있는 조그만 의원이다. 정신병원이라 하면 미친 연놈만 다니는 곳이라 여겼는데, 오십 평생 살며 이곳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곧장 미용 학원에 등록했다. 아버지의 권유였다. 기술 하나 있음 굶어 죽지 않는다는 사회분위기도 있었고 뭐,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리고 세월을 야속하게 흘렀다. 삽 십 년. 그동안 나의 세계는 이 10평짜리 좁은 미용실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아들은 재수를 하겠다고 산속 고시원에 들어갔다. 고3 딸은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앞으로 뭐 해 먹고살까, 걱정이 태산이다. 평생 내가 느낀 건 한 번 정한 직업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엄마로서 이렇다 할 조언은 해주지 못하겠다. 그저 공부해라 놀지 마라 한숨과 함께 다그칠 뿐. 첫 단추를 잘 꿰야할 텐데, 그게 제일 염려되기 때문이다.
이제 팔십을 바라보는 엄마는 날로 쇠약해져 간다. 걸어서 오분 거리의 엄마집에 들러 매일 밥을 하고 집안일을 하는 것도 이제는 힘들고 지치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할까. 오 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나 희생은 늘 당연했다. 진작 고향을 떠난 장남인 오빠와 동생들은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만 얼굴을 비칠 뿐이다. 나도 속에 쌓이고 응어리 진 게 많지만 차마 싫은 소리는 하지 못하겠다. 다들 먹고살기 힘들 것이란 마음에.
엄마가 노후자금으로 뒀던 땅이 있다. 팔순이 넘으면 그 땅을 팔아 남은 생을 보내는데 보태리라는 계획이었다. 어느 날 오빠가 그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어디 땅을 샀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새언니는 새로 산 땅 가격이 계속 떨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아쉬운 소리를 전했다. 이듬해 설날, 오빠 식구는 비엠더블유를 타고 내려왔다. 엄마는 그 사건 이후로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진머리방이 죽었다. 2년을 암과 싸운 결과였다. 십여 년 전, 우리는 한동네 가까운 데서 각자 미용실을 하며 오다가다 자연스레 안면을 텄다. 자연스레 친해진 우리는 세미나도 같이 다니고 저녁에 애들 데리고 모여 함께 밥도 먹고 가끔 포장마차에서 맥주도 한 잔씩 하는 그런 사이였다. 그런 그에게서 갑상선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를 향한 걱정과 함께 처음으로 미용실을 ‘격하게’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독한 염색약이, 파마약이 그녀를 그렇게 병들게 만들었고 결국 나 또한 그렇게 죽어가리란 상상에. 진머리방이 죽기 며칠 전, 얼굴에 보기 좋게 살이 붙고 안색이 많이 좋아졌었다. 이제 좀 회복이 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도 조용히 떠났다.
그 무렵이었다. 처음 보는 이상한 남자가 미용실에 나타난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