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리 부끄럽단 말인가!!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기숙사 학교였다. 월요일 아침에 등교해서, 토요일 점심때 하교한다. 그렇게 일주일을 갇혀서 수업 듣고, 자습하는 생활을 반복한다. 혈기 왕성한 시절이다 보니 갇혀있던 생활이 너무나 답답했다. 한 번씩 탈주 욕구가 들면, 야자 시간에 뒷담을 넘어 근처 아파트 단지로 갔다. 목적지는 바로
노래방
야자를 빼먹고 나갔다 걸리면 벌점을 받고, 벌점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기숙사에서 쫓겨나는 엄벌이 있었음에도 노래방에서 노래로 스트레스를 날리고 싶은 욕구는 종종 일어났다. 그럴 때면 친구들과 아프다는 핑계로, 실험실에 간다는 핑계로 외출증을 끊은 다음 탈주를 감행하곤 했다. 많게는 일주일에 3~4번 노래방에 가기도 했다. 노래방 사장님이 좋아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함께 놀던(지금도 자주 보는) 친구들은 모두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고음 원 툴'이던 나 역시 노래 부르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절대 노래를 잘한다는 것이 아니다. 음정을 잘 못 맞추고 음색도 좋지 않아 그다지 내 노래가 듣기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다만, 유일한 장점은 고음 음역대가 발달하여, 웬만한 고음은 삑사리 없이 부를 수 있다. 특히, 고등학교를 다니던 90년대 말은 락발라드의 전성시대였다. 물 만난 고기처럼 온갖 고음의 노래를 마구 질렀던 걸로 기억한다.
주말에 친구를 만나 서면에서 놀 때도 노래방은 필수 코스였다. 당시 처음 보급되기 시작했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 때리고, '유가네 닭갈비'에 가서 '닭야채볶음밥'(닭갈비가 아니다. 손톱만한 크기의 닭고기와 밥을 볶는, 돈 없는 학생들이 즐겨 찾는 메뉴이다. 가격은 1인분에 2000원대였다)을 콜라와 함께 먹고, 마지막에 찾는 곳은 늘 노래방이었다.
대학교 역시 기숙사 학교라, 노래방에 가기는 더 쉬워졌다. 아, 그러고 보니 대학 입학 전, '꽃동네'에 봉사활동을 갔을 때(대학에서 전 신입생을 다 보냄)에도 저녁에 탈주를 감행해, 1시간을 걸어 읍내에 가서 처갓집양념치킨을 먹고 노래방을 갔었다. 꽃동네 봉사 가서 노래방 갔던 기억은 완전히 까먹고 있다가 글을 쓰다 보니 무의식에서 뿅 하고 튀어나왔다.
암튼, 대학생 때도 기숙사에 10년을 살았고, 내가 살던 기숙사는 통금이 없었다. 그 말은 뭐냐. 언제든 술을 마시러 갈 수 있단 얘기다. 밤 12시고, 1시고 게임을 하다 술을 마시러 가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그렇게 새벽까지 술을 먹고는 늘 마무리로 노래방을 갔다.
당시 갔던 노래방은 '고은노래방'이었다. 노래방 시설이 그렇게 좋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이 계속해서 찾았던 이유는 시간이 사실상 무한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 결제를 하면 노래방을 방문한 친구들이 지쳐서 나올 때까지 추가 시간이 계속 들어왔다. 사장님께 몇 번이나 도전을 해봤지만, 단 한 번도 그 노래방에서 남은 시간 제로를 본 적이 없다.
대학을 나오고 사회인이 되고서는 노래방 가기가 쉽지 않아 졌다. 회사 사람들과 같이 노래방을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고, 또 사회에서는 노래방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결국 1년에 2~3번 보는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 정도 만나야 노래방을 갈 수 있다.
그런 나에게 천금과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바로
코노
코노, 코인노래방이 생기고 나서는 몇 곡의 노래를 가볍게 부르기 아주 좋아졌다. 시내에서 모임이 있거나 했을 때 조금 일찍 도착한다거나 하면 코노에 잠시 들려 가볍게 3곡에서 6곡의 노래를 부르면 스트레스를 확 풀 수 있다.
무엇보다 코노의 가장 큰 장점은 여럿 있을 때 부르기 난감한 노래를 눈치 안 보고 부를 수 있다는 점. 고음 원 툴이라 여전히 지르는 노래를 부르길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이가 들어서인지 고음이 예전만큼 잘 올라가지 않는다. 즐겨 부르는 'M.C. The Max'의 노래들의 성공률이 절반 정도로 뚝 떨어졌다. 여기서 성공률은 잘 부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삑사리 안 나고 고음을 마무리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되면서 친구들과 노래방을 가도 초고음의 노래들은 피하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탈출구가 바로 코노였다. 코노에서는 이수에 빙의해서 마구마구 지를 수 있으니.
자 드디어 오늘 글을 쓴 이유가 나온다. 지금까지 빌드업이었다.
내가 재직 중인 학부는 대학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별관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본관까지는 도보 약 5분 정도. 며칠 전 본관에 회의가 있어 갔다가, 다시 연구실로 복귀하려 하는데 학교 정문에 코인 노래방 간판이 보였다. 지금까지 안 보였던 간판인데 그날따라 눈에 띈 거다.
갑자기 노래가 부르고 싶어졌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가르치는 학생들은 대부분 다른 건물에 있기에 설마 아는 학생을 보겠어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코노에 들어가서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그날따라 노래가 잘 불러졌다. MC the MAX의 <어디에도>를 오랜만에 삑사리 없이 완창 했다.
그렇게 6곡의 노래를 부르고 문을 나서는데, 노래방에 온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말.
어.. 어.. 교수님, 안녕하세요
지난 학기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었다.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왜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었을까? 아니 근데 잘못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못 갈 곳을 간 것도 아닌데 왜 숨고 싶어 졌을까.
학교 근처에서 학생들을 가끔 마주치긴 하지만, 본관 근처에서 마주친 적은 잘 없어서 너무 방심했나 보다. 어떻게 대답 인사를 하고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아마 얼굴은 계속 빨개져있었을 것 같다. 이런 시련을 주려고, 신은 이수를 나에게 빙의시켜 <어디에도>를 완창 하게 했나 보다.
앞으로 코노는 무조건 집 근처에서만 가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