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PO에 대한 고찰
윤우 아빠 교수 아니야?
이사하기 전 살았던 아파트 단지에서 우리 아들의 어린이집 동기 부모에게 들은 말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교수라는 직업은 출퇴근이 자율이기에 어린이집 등하원을 내가 해주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방학 기간이라 연구실 출근을 하지 않고 재택으로 작업을 하다가 하원을 시켜주기 위해 집을 나섰다.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그리고 주말에 즐겨 쓰던 'Boston Redsox' 스냅백을 쓰고 나갔는데, 그걸 지나가던 어린이집 친구 부모가 봤나 보다. 그리고 위에 적힌 말처럼 나보고 교수 맞냐는 질문을 옆 사람에게 했다는 것. 이 이야기는 돌고 돌아 우리 와이프가 듣게 된 것이고. 기분이 나쁘거나 그러지는 전혀 않았다. 다만 아직 사회에서 바라보는 교수에 대한 선입견에 놀라웠을 뿐.
교수는 평소에도 정장 입고 다녀야 하나요?
패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간혹 주말이나 편한 상황에 한번씩 쓰게 되는 보스턴 레드삭스 스냅백. 이 스냅백은 미국 여행을 갔을 때, 레드삭스 야구 경기 직관을 하며 직접 구매를 한 모자이다. 2004년 커트실링의 핏빛 투혼과 양키스전 리버스 스윕으로 감동을 준 레드삭스였기에 꼭 한 번 팬웨이파크에서 야구를 보고 싶었고, 운때가 맞아 보스턴 레드삭스와 텍사스 레인저스 경기를 직관할 수 있다. 마침 당시 레인저스에는 추신수 선수도 있어 보는 재미가 더 있었고. 어렵게 간 팬웨이 파크이기에 여러 기념품도 샀다. 옆의 사진처럼 레드삭스 티셔츠도 사고, 레드삭스 모자도 샀다. 국내에서도 MLB 모자들을 쉽게 구매할 수 있지만, 현지에서 구매하는 건 또 색다른 재미 아닌가. 이렇게 득템 한 레드삭스 스냅백은 아직까지 나의 외출 시 머리를 가려주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30~40대 유부남 아저씨들이 스냅백을 즐겨 쓴다며 약간 희화화하는 밈(meme)이 있어 스냅백을 쓰는데 약간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아직 새로운 모자가 공수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나의 외출은 스냅백과 함께인 경우가 많다.
그날 어린이집 하원 역시 저 스냅백과 함께였는데, 이러쿵저러쿵 소리가 나오니 와이프는 마음이 쓰였나 보다. 당장 MLB 매장에 가서 스냅백 말고 정상적인 모자를 사자고. 물론 아직 맘에 드는 모자가 나타나지 않아 레드삭스 스냅백이 나의 모자 1 선발을 차지하고 있지만, 한 번씩 모자를 집어 들면 머릿속에 낯선 이가 말을 하는 것 같다.
윤우 아빠 교수 아니야?
스냅백 사건은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이 사건이 새삼 오늘 생각나 이렇게 끄적이는 이유는 오랜만에 지하철로 출근을 하면서 본 사람들의 복장 때문이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의 많은 남성분들은 반팔 티셔츠 혹은 셔츠에 긴 바지를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나의 복장은 편한 반팔 피케 셔츠에 반바지. 이 더운 여름에 이렇게 편한 복장을 입고 출근할 수 있음에 감사해하면서, 한편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나의 모습에 딴지를 걸던 이전 학교의 교수님들이 생각이 났다.
내가 예전에 근무했던 삼성전자는 거의 최초로 쿨비즈 복장 착용을 시행했다. 그 이후부터 여름에 출근할 때는 린넨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로퍼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여름에 반바지 입고 일하는 것이 일상이 된 나였기에, 교수가 된 후 여름에는 주로 반바지를 입고 연구실에 갔다. 그러던 중 학과 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총장님이나 보직자가 참여하는 회의가 아닌 학과 회의라서 평소처럼 편하게 입고 갔는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지금 재직 중인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다. 지금 학교 교수님들은 종강 회의 때 반바지 입고 오시는 분들도 꽤 계시다.)
"어떻게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올 수가 있지?"
이후 학과회의는 교수가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와도 되는지에 대한 토론의 장으로 바뀌었다. 반바지를 입고 오면 안 된다는 측은 교수의 품위를 얘기하였고, 반바지를 입어도 무방하다는 측은 어차피 방학이라 학생들도 많이 없고, 연구실에 혼자 있는데 반바지를 입든 뭘 입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었다. 결론이 날 수 없는 문제라 유야무야 마무리 되었지만 마음 한편에 찝찝함은 계속 남아있었다.
아직도 난 반바지를 입고 간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지금도 반바지를 입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고. 물론 중요한 회의가 있거나 공식적인 자리가 있으면 셔츠에 면바지를 입는 센스는 갖추고 있다. TPO(Time, Place, Occasion)에 맞춰 복장을 입기만 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될까?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수업 듣는 복장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다들 싫어하지만,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일부 교수님들은 모자를 쓰고 수업을 듣는 것을 용납 못하셨다. 모자를 벗어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고, 슬리퍼를 신고 수업 오는 것도 크게 혼내는 교수님들도 계셨다. 아마 예전 교수님들께서 요즘 강의실을 보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요즘 강의실은 모자 쓴 학생 절반에, 슬리퍼 쓴 학생, 요즘은 또 그 크록스 신고 오는 학생들이 그렇게나 많다. 하지만 뭐 어떤가? 수업만 열심히 듣고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지.
다만 복장을 갖춰야 할 때는 갖춰야 한다. 얼마 전 교내 공모전 심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 조는 모든 조원이 옷을 맞춰 발표에 임하였다. 흰색 셔츠에 검은 면바지, 검은 구두를 맞춰서 발표에 임한 것이었다. 반면 다른 한 조는 발표하는 학생이 슬리퍼에 맨발차림이었다. 심사에 하등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만약 이 자리가 회사의 중요한 PT 자리였다면 큰 문제가 될 법한 복장인 것이었다. 채점을 하는 데 있어 두 조의 복장은 정말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발표 내용 자체가 복장을 잘 갖춘 팀이 더 좋았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요즘 말로 알잘딱깔센이 있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의 줄임말이다. 이렇게 유행이 지나가고 있는 줄임말을 쓰면 아재라고 하는데, 또 쓰고 싶은 걸 보면 어쩔 수 없나 보다. MZ세대의 앞단에 있는 나이이기 때문에 꼰대같이 이런 철 지난 유행어를 아직도 쓰고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알잘딱깔센을 항상 유념하며, 있어 보이는 말로 TPO에 맞춰 복장을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