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맞는 말을 쓰는 건 어려워
학부 4학년 졸업반 시절 얘기다. 나는 당시 학과 대표를 역임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반 때, 학과대표를 하게 되면 신경 쓸 일이 정말 많다. 굵직한 이벤트만 해도 졸업여행, 졸업사진이 있고 교수님들께 식사를 대접하는 사은회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매해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체육대회, MT, OT 등은 기본이고.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할 준비를 하며, 저 수많은 학과 일을 챙기려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저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일은 졸업사진 준비. 특히 교수님들과 단체사진을 위해 스케줄 조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워낙 교수님들이 바쁘셨으니. 그렇게 일정 조율을 메일로 하는데 당시 학과장이셨던 교수님이 아래와 같은 메일을 보내오셨다.
처음에는 메일을 보고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쓴 메일 본문을 다시 봤다. 나름 정중하게 메일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메일 마지막에 나온 인사말.
그럼 수고하십시오.
당시까지만 해도 "수고하세요"란 인사말이 손윗사람에게 쓰면 안 되는 표현인 줄 전혀 몰랐다. 오히려 수고하란 말 자체가 앞으로 하시는 일들 잘 되길 바란다는 좋은 인사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당혹스러웠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충분히 예의 바른 표현이었는데, 지적을 당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다른 교수님 한 분도 나를 만난 자리에서 "수고하세요는 손윗사람에게 쓰면 안 돼."라고 하시며 크게 꾸짖으셨다. 안 그래도 졸업사진 일정을 조율하느라 바쁜데 쌍으로 꾸지람까지 들으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던 것인 인지상정.
약간 마음이 진정되고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교수님들께서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나를 혼내지는 않으셨을 테고 내가 잘못한 게 무엇인지 되짚어 보았다. 그리곤 알게 되었다. 수고하세요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수고하다'는 '일을 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렵고 고된 일을 상대방에게 권하는 것이 수고하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쓰게 되면 '일 열심히 해'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상당히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나는 당시 학과 교수님들 전체에게 한 것이다.
윗사람에게 꾸지람을 듣게 되면 기분이 나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았기에 기분 나쁜 마음 뒤에 고마운 마음도 찾아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후 내가 메일이나 문자로 소통을 할 때 한번 돌아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말은 절대로 쓰지 않았으며, 메일 본문을 여러 번 살펴보며 예의에 어긋나는 표현이 없는지 살펴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에 나오기 전 교수님들께 들었던 꾸지람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럼 내가 왜 15년도 훌쩍 지난 과거 일이 생각나서 메일함까지 뒤지게 되었을까? 얼마 전 학과 조교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완전 입장이 반대가 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교수가 되고 대학원 조교 학생과 문자로 대화를 나누다 다음과 같이 마무리가 되었다.
먼저 이야기할 것은 기분은 절대로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강한 부정을 하는 것은 긍정이라고 한다지만 정말로 "감히 '수고하세요'라는 표현을 쓰다니! 나보고 고생하란 말이냐!!" 따위의 감정이 든 것은 아니었다. 과거 내가 대학생 시절 아무런 악의가 없이 실수를 했듯이, 우리 조교선생님도 그런 실수를 한 것일 뿐이다. 게다가 '수고하세요'는 사전적 의미와 실생활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이 다르다. '수고하세요'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쓰면 안 된다고 알려져는 있지만, 아직도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말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관용적으로 마무리 인사말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표현을 다수의 사람들이 쓴다고 해서 올바른 표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들으며 왜 '고생'하라는 악담을 손 아랫사람이 하냐고 발끈하는 사람도 꽤 많다.
내가 잠시한 고민은 이런 관점이었다. 나중에 사회에 나가게 되면 다양한 손윗사람들과 일을 하게 될 텐데 그때 실수하지 않도록 지금 본인이 한 실수를 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 '수고하세요'라는 표현은 아랫사람이 쓰면 안 되는 표현이니 다음부터 유의하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마치 내가 학부 시절에 교수님들에게 지적을 받았던 것처럼.
하지만 이러한 지적이 꼰대처럼 받아들여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게다가 조교선생님과는 전공이 달라 일면식도 없는 상황. 일면식도 없이 문자로 잠시 대화를 나눈 교수가 이런 표현은 윗사람한테 하면 안 되는 거야라고 했을 때 반응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쉽게 할 수 있다.
결국 나는 저 상황에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추후 조교 선생님과 더 친밀해진다면 그때 한번 가볍게 이야기해 주자라는 생각만 남긴 채. 과연 내가 잘한 것인지 하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있다. 언젠가 사회에 나가게 되면 다양한 상황에서 비즈니스 예절을 배우게 될 텐데 미리 알려주는 것이 좋은 건지, 현실에 부딪혀가며 배우는 것이 좋은 건지 아직 나도 잘 모르겠다. 학부 때 받았던 지적들이 당시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행동을 고칠 수 있었던 걸 생각해 보면 더 고민은 깊어진다. 특히나 학부 학생들이 과제를 제출하거나 문의사항들을 물어올 때 가끔 보이는 예의 없는 표현들을 볼 때면 더 고민이 된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