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리스 캠퍼스
이번 1학기 강의한 수업 중 파이썬으로 데이터를 분석해 보는 실습 교과목이 있었다. 우리 학과는 문과 베이스 학생이 다수여서 파이썬은 학생들에게 낯설고 또 어렵다. 그래서 수업을 마치면 학생들의 질문이 많다. 적게는 2~3명에서 시험 기간에는 10명 가까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 질문을 한다. 줄을 선 학생들을 처음 봤을 때 살짝 놀란 바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작년 일간지 신문 기사를 한 번 살펴보자. (링크는 하단 참고)
서울대학교 강의실을 찾아보니 학생 21명 중 20명은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필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전공 도서를 책상 위에 펼쳐놓은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대학생 하면 언뜻 떠오르는 이미지. 삼삼오오 모여 전공책을 잔뜩 옆에 끼고 다니는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다. 많은 학생들이 무거운 전공 책 대신 태블릿을 들고 다니기 때문. 실제로 기사에 나온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전공 책을 무겁게 가방에 싸들고 다니는 것보다 스캔을 해서 파일로 바꿔 태블릿 PC로 보는 게 편하다
최소한 내가 경험해 본 강의실에 한해서는 사실이다. 이제 학생들은 전공 책과 노트, 필통을 가방에 넣어 다니지 않고 가벼운 에코백에 아이패드와 애플펜슬만 지참하여 등교한다. 수업을 시작하면 아이패드에 저장된 강의자료를 열고, 애플펜슬로 강의 내용을 필기한다. 노트북도 무겁다고 안 들고 다닌다. 들고 다니는 노트북도 가벼운 맥북 에어가 많다.
기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페이퍼리스(paperless) 캠퍼스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 태블릿과 함께 자란 세대이다. 심지어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에 익숙해지면서 전자기기를 수업에 활용하는데 거부감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요즘 대학 주변의 인쇄소나 복사집은 조용하다. 시대가 변했음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징표라고 할까.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건너 듣기로 어떤 교수가 자신이 업로드한 강의자료를 수정하자 한 학생이 교수에게 한 이야기이다. 왜 교수는 본인 수업의 강의자료를 한 번 업로드 한 다음에 수정을 하면 안 될까? 엄밀히는 수업을 시작한 강의의 자료를 수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인데, 혹시 이유가 짐작이 되는가?
이유는 아이패드와 애플펜슬과 관련이 있다. 강의가 진행이 되면 학생들은 업로드된 강의자료를 다운로드한 후, 아이패드에 띄우고 애플펜슬로 필기를 한다. 그렇게 필기를 한참 하며 수업을 들은 우리의 학생들. 하지만 다음 수업에서 교수가 강의자료에서 수정하거나 보완할 내용이 발생하여 수정된 강의자료를 업로드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이 학생은 필기를 어디에 해야 할까?
이미 수정되기 전 강의자료에 필기가 잔뜩 되어 있다. 이걸 새로 수정이 된 강의자료에 옮기기는 번거롭다. 그렇다고 수정이 안 된 강의자료에 필기를 이어가기에는 구 버전의 강의자료라 찝찝하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학생들이 직접 교수에게 강의자료 수정을 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강의자료를 중간에 수정하면 필기의 문제로 인해 약간의, 혹은 다소간의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래서 강의자료를 업로드할 때면 실수한 건 없는지 꼭 검토해보곤 한다. 그럼에도 강의자료에 문제가 생기는 건 종종 발생한다. 지난 학기에도 그런 경우들이 종종 발생했다. 그때 나의 대응 방안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강의자료 수정이 언제 이뤄졌는지 명확히 알려준다. 그리고 처음 올린 구 버전의 전체 강의자료, 수정된 버전의 전체 강의자료, 수정된 페이지만 따로 모은 강의자료를 모두 함께 올려둔다. 학생들의 스타일이 모두 다르니 어떤 버전의 강의자료를 선호할지 몰라 다 올려주는 것이다. 뭘 좋아할지 모르니 다 차려주는 뷔페식이라고나 할까.
기존 버전의 필기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변경된 페이지만 따로 받아서 거기에만 필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버전의 강의자료에 다시 필기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고, 그냥 무던하게 필기를 이어가는 학생들도 소수지만 있을 것이다.
벌써 2학기 강의가 다음 주 시작된다. 강의 준비를 하며 배포된 강의자료의 수정을 최소화하기 위해 꼼꼼히 살펴보다 넋두리 아닌 넋두리를 해보았다. 이렇게 해도 또 강의자료를 수정해야 할 일은 늘 발생한다. 필기의 흐림이 끊기더라도 학생들이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길 :)
기사출처: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3/21/R4PWG64JHNHONBN43PDOPMBDW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