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쟁 시대의 개막
90년대 초딩들에게 일요일은 만화를 맘껏 볼 수 있는 날이었다. 아침 8시면 KBS 2TV에서는 <디즈니 만화동산>을 방영해 주었다. 늦잠을 자고 싶어도 눈을 비비며 일어나 디즈니 만화를 본 초딩들은 전국노래자랑이 끝나는 오후 1시에 다시 TV 앞으로 모여든다. 바로 KBS 1TV에서 방영해 주는 국산 만화들을 보기 위해서이다. <달려라 하니>, <천방지축 하니>, <날아라 슈퍼보드>, <아기공룡 둘리> 등이 무한으로 로테이션하며 나오던 이 시간대는 투니버스가 없던 시대에 만화를 맘껏 볼 수 있는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무한 로테이션으로 방영되던 당시 만화들은 철저히 어린이들 취향이었다. 하지만 유독 한 작품만큼은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분위기로 아직도 회자되곤 한다. 그 작품은 바로,
방영 당시 가벼운 마음으로 보던 다른 애니메이션과 달리 원더키디는 분위기 자체가 암울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포칼립스 수준까진 아니지만 주인공인 아이캔(Ican)이 외계인 여자친구 예나와 함께 아빠를 찾아가는 여정은 상당히 절망적으로 느껴지며, 기계문명과 외계세력, 그리고 인공지능(놀랍게도 인공지능이 등장!)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포스는 어린이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어린아이들은 평소 보던 만화와 다른 분위기에 원더키디만은 외면하는 경우도 많았고, 나 역시 처음에는 안 봤던 걸로 기억을 한다. 그러다 차츰 고학년(그래봤자 초딩)이 되면서 흥미를 느끼며 재밌게 감상하였고, 청소년기에 이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명작으로 인정을 하기에 이른다. 지금에 와서 이 애니에 대한 평가는 당시 국내 기술을 영끌하여 갈아 넣은 불세출의 명작이라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
90년대 2020 원더키디를 볼 때만 해도 2020년이라는 시기는 너무나도 멀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래였다.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이 악마와 계약한 후 블루스의 전설이 되었지만 1938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한 이후, 만들어진 도시 괴담인 '27세 클럽(The 27 Club)'. 천재는 27세에 요절한다는 이 이야기는 브라이언 존스, 지미 헨드릭스, 커트 코베인 등이 27세에 요절하며 유명한 괴담이 된다. 처음 27세 클럽 이야기를 듣고 '혹시 나도 천재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아직 27살까지 미래가 많이 남았다며 안도를 했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2020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래였다. 하지만 벌써 2023년이 되었다.
1989년 만들어진 원더키디에서 예측한 2020년 모습은 어떠할까?
우선 애니메이션처럼 자유롭게 우주여행을 한다거나, 광선총을 무기로 쓴다거나, 최종병기인 데스 스타가 등장하는 일 등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과거 상상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가장 기술 발전 속도가 느린 분야가 우주 과학이 아닌가 싶다. 1969년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금방 화성이고 금성이고 갈 것 같았지만, '아폴로 계획' 이후 아직 인류는 달에 가고 있지 않다. 이제야 다시 '아르테미스 계획'을 통해 달에 갈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반대로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기술도 있다. 주인공 아이캔 옆에는 항상 주인공을 도와주는 로봇 '코보트(Kobot)'가 있다. (코보트는 코리아 + 로봇에서 유래한 이름) 코보트는 놀랍게도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온 HAL9000이 단순히 인공지능이 탑재된 고정형에 가까운 로봇이었다면 코보트는 휴머노이드이면서 이동수단으로까지 변신하는 녀석이다. 트랜스포머에 인공지능이 탑재된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 녀석은 오토바이가 되었다가 비행기가 되었다 하며 주인공의 이동 수단이 되어주기도 하고, 인공지능을 탑재하여 온갖 잡일을 해주기도 한다.
이미 박물관이나 공항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 로봇들이 비치되어 있고, 식당에는 서빙을 해주는 로봇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원더키디에 나온 휴머노이드와 같은 로봇 기술의 발전은 더딘 상황이다. 하지만 코보트에 들어간 기술을 요소별로 쪼개어 본다면 이미 상당 부분 현실화가 되어 있다. 먼저 코보트에 탑재된 인공지능 기술은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아직 집안일을 해주는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챗GPT와 같이 인간을 도와주는 수준까지는 도달한 상황.
그리고 코보트의 이동형 기능만 떼어놓고 본다면 현대의 PAV(Personal Air Vehicle)이나 드론이 상당 부분 유사하다. PAV는 날아다니는 자동차의 형태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많은 항공 업체 및 자동차 업체는 날아다니는 자동차 형태의 이동 수단을 개발 중에 있으며, 시제품을 공개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사람을 태우고 하늘을 난다는 것 자체가 가지는 위험성과 함께 생각보다 경제성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상용화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대신 드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소형 드론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며 맹활약하고 있다. 2022년 발발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론의 활약은 어마어마하다. 심지어 드론이 인공지능을 탑재한 상태로 전장을 누비고 있다. AI 전쟁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은 현대전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심지어 CNN으로 생중계된 전쟁 장면을 통해 최첨단 무기의 발달상을 전 세계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2023년 현재 진행형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인공지능이 전장에서 맹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전 세계 사람들이 확인한 최초의 전쟁이다. 인공지능이 인류 전쟁사의 변곡점이 되고 있는 순간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만 해도 드론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은 전문가들 사이에 팽배하였다. 하지만 이제 드론에 대한 논쟁은 끝났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전쟁에서 터키산 자율 주행 드론(TB2 Bayraktars)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의 드론은 러시아 전차부대의 진격을 막았으며, 흑해 함대의 기함인 모스크바호를 격침하는 데에도 드론의 역할이 컸다. 우크라이나의 주력 드론은 무인으로 이착륙이 가능하지만 폭탄 투하에는 인간의 조작이 필요하다. 러시아는 자체 생산한 자율주행 기능 탑재 자폭 드론(KUB-BLA)을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도시에 대한 공습에 드론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는 마치 2차 대전 당시 영국을 폭격한 독일의 로켓에 비견된다.
문제는 전장에서 나타난 드론들이 '킬러로봇'의 역할을 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킬러로봇은 인간의 개입 없이 인공지능이 인간을 공격하는 무기를 뜻하는 것으로 수많은 SF영화에서 등장한 바 있다. 그런데 이 킬러로봇이 실제 전장에 등장하였다는 보도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1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러시아군의 자폭 드론 공격이 감행되어 임산부를 포함한 4명이 사망한 바 있다. 이때 활용된 자폭 드론에 인공지능 기술이 탑재가 되어 있어 논란이 가중된 것이다. 해당 드론은 조종사 없이도 자율비행이 가능하고, 감시, 정찰, 폭격 등의 임무 수행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 이 드론의 인공지능이 스스로 표적을 판별 후 자폭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로 밝혀질 경우 킬러로봇이 민간인을 공격한 것이 되어 큰 파장이 벌어질 전망이다.
이제 AI전쟁 시대의 막이 열렸다. 심지어 인공지능이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이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 할 때가 왔다. 더 이상 공상과학만화에만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원더키디의 세계관에서는 2020년에 우주에서 전쟁을 하지만, 우리는 2023년 지구에서 인공지능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하고 있다.
2020 원더키디 이야기로 마무리해 보자. 원더키디에서 등장하는 악당은 바로 인공지능이다. 천재 과학자 헨리 경이 외계 행성으로 이주하여 만든 인공지능 남매 중 누나는 마라 대마왕으로, 동생은 데몬 마왕이 되어 외계 행성의 원주민들과 조난당한 지구인을 노예로 부려왔다.
이들 인공지능이 폭주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헨리 경이 인공지능에 '양심'을 프로그래밍하지 않아서이다. 양심이 탑재되지 않은 인공지능 대마왕 남매는 헨리 경을 죽이고 폭주하게 된다. 양심을 고려하지 않은 첨단 기술 발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1989년의 국산 애니메이션은 2023년의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