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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운 Oct 24. 2023

최고의 가을 영화, 주성치의 <서유기>

계속 봐도 질리지 않는 영화

작년 딱 이맘때이다. 여러 대학에 지원서를 넣고 면접을 준비하던 시절. 당시 지방에 거주 중이었기에 서울로 면접을 보러 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것도 삼성전자를 때려치우고 교수하겠다고 설치고 있었기에 사실상 퇴로는 없던 상황.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을 맞이한 심정으로, 아니 신립 장군은 왜군에 사실상 전멸당하였으니, 한신이 배수진을 치고 정형 전투에 임했던 마음과 같이 절박한 심정으로 면접을 준비했다.


지방에서 당일치기로 서울에서 진행되는 발표 면접에 참여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간다. KTX로 2시간 넘게 올라와서 다시 대중교통으로 대학교까지 찾아가는 일정은 도착만 해도 진이 빠지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불편한 양복을 입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 그래서 보통 면접 일정이 잡히면 전날 상경하여 비즈니스호텔에서 하루 묵으며 면접을 준비하곤 하였다.


비즈니스호텔에서 면접 준비를 하는 것은 꽤나 고통스럽다. 이미 다 외우고 있는 영어 발표 스크립트를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은 신물 나는 상황. 그렇다고 혼자 술을 마시기도 부담스럽고, 왁자지껄 떠드는 예능 프로를 보는 것 역시 기분에 맞지 않다. 집에서는 그 어떤 OTT 서비스도 구독하고 있지 않기에 호텔에서 훑어보는 넷플릭스 프로그램 리스트들은 눈길이 가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자극적인 영화는 자극적이어서, 무작정 슬픈 영화는 또 우울해져서 플레이에 손이 가지 않는다.


이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틀어놓을 수 있는 익숙한 영화가 제격이다. 그것도 여러 번 관람하여 심적으로 크게 타격을 안 받는 영화를 봐야 한다. 게다가 시간도 길면 금상첨화.


그래서 선택한 영화. 주성치의 서유기 월광보합과 선리기연 (서유쌍기)


이후 수차례 있었던 면접의 전날이면 주성치의 서유쌍기를 틀어놓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 영어 발표 스크립트를 보는 것이 루틴이 되어 버렸다. 익숙한 영화가 BGM으로 깔려있는 상황은 상당한 안정감을 주었으며, 너무나도 많이 봐서 익숙한 대사들 역시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나에게 가을 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성치의 서유기가 되었다.


서유쌍기 중 선리기연은 최고 명작




1995년 개봉한 주성치의 서유기 영화는 총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은 월광보합이고, 2편은 선리기연이다. 따라서 순서대로 영화를 보는 게 좋으며,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을 합쳐 <서유쌍기>라고 부른다. 주성치 영화는 국내에 마니아들이 상당히 많다. 대부분은 나와 같이 <쿵푸허슬>이나 <소림축구>가 유행하던 시절에 주성치를 알게 되어 <서유쌍기>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서유쌍기의 첫 번째 영화 <월광보합>은 지금 보기에는 조금 진입 장벽이 있다. 90년대 영화의 특성상 화질이 좋지 않고, 조금은 마초적인 주성치의 개그 장면은 여성분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보통 이럴 경우 취향을 강요하는 것이 좋지 않으나 주성치의 서유기만큼은 초반 진입 장벽을 제발 넘기고 끝까지 보기를 추천한다. 초반의 진입장벽만 넘게 된다면 월광보합은 지금 봐도 손에 꼽을 만한 코미디 영화로 다가올 것이고, 후속작품인 <선리기연>이라고 하는 눈물 쏙 빼는 최고의 멜로 영화도 볼 수 있게 된다.


월광보합의 하이라이트는 주인공인 지존보(주성치)가 사랑하는 여인인 백정정을 구하기 위해 "뽀로뽀로미"를 외치며 월광보합을 사용하는 장면이다. 월광보합은 시간 여행을 시켜주는 도구로, 보름달이 떴을 때 뽀로뽀로미를 외치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된다. 지존보는 이 주문을 외우며 과거로 돌아가 백정정을 구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정말로 웃긴 장면들도 나오지만, 지존보의 절박한 심정과 대비되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월광보합>에서 제일 유명한 장면


뽀로뽀로미로 들리는 이 주문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중국어로 발음한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불교 용어로 '피안(깨달음)에 이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반야바라밀이 들어있는 불경을 한역한 사람이 당나라의 현장법사이다. 현장법사는 바로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모티브가 된 인물. 또 하나 재밌는 것은 <천녀유혼>의 왕조현이 도술을 할 때 외치는 주문이 반야반야밀, 우리에게는 뽀로뽀로미로 들리는 불경의 이름이다.


월광보합으로 피안에 이르고자 하는 지존보는 과거로 수 차례 여행을 가지만 간발의 차이로 사랑하는 여인인 백정정을 구하지 못한다. 그러다 월광보합의 오작동으로 지존보는 500년 전의 반사동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반사동 동굴에서 진 히로인인 반사대선 자하(주인)를 만나게 된다. 주인이 연기한 반사대선 자하의 등장신은 아직도 회자가 될 만큼 주인이 정말 예쁘게 나온다.


첫눈에 지존보를 콕 찍은 자하




서유기의 첫 번째 작품인 월광보합은 위의 장면처럼 지존보가 자하와 만나며 끝이 난다. 그리고 시작하는 서유기 <선리기연>. 처음 서유기 선리기연을 봤을 때만 해도 지존보와 자하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꽤나 몰입했던 것 같다. 특히나 지존보가 손오공으로 각성하면서 한 최고의 명대사에서는 가슴이 찡해질 만큼의 감동을 받게 된다.


진정한 사랑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난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그리고 그걸 잃고 나서야 크게 후회했소.
인간사 가장 큰 고통은 바로 후회요.
만약 하늘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면, 사랑한다 말하겠소.
기한을 정하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겠소


사실 이 대사는 또 하나의 명작 홍콩 영화인 <중경삼림> 속의 명대사를 오마쥬한 것이다. 금성무가 열연한 하지무의 대사가 그것인데.


영화 <중경삼림> 속 명대사


지존보 역할을 한 주성치는 이 대사를 패러디하며, 원작 이상의 감동을 안겨준다. 아직도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그 장면. 뒤늦게 자하의 사랑을 깨달았지만 제천대성이 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완수해야 하는 상황. 긴고아를 쓰며 내뱉는 지존보의 절절한 마음을 담은 이 대사는 볼 때마다 아련해지는 느낌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처음 선리기연을 봤을 때 감상은 나도 저런 아름다운 사랑을 해보고 싶다였다. 하지만 살아온 세월이 늘어나면서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에 대한 감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생에 대한 경험이 쌓여서일까. 단순 사랑에 대한 영화를 넘어 우리네 인생을 다룬 영화로 서유기는 다가오기 시작했다.


특히나 마지막 엔딩 장면은 예술 그 자체이다. 자신의 운명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보내고 뒤돌아서야만 하는 지존보, 아니 제천대성 손오공의 모습은 우리가 걸어온 인생길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감동을 안겨준다. 주어진 운명과 사랑을 두고 갈등하는 상황을 겪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리며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자하는 떠나는 제천대성의 뒷모습을 아련히 바라보고, 제천대성은 잠시 몸을 빌려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을 이어주고 속세를 등지는 장면(난 이때 처음으로 등으로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은 OST인 일생소애와 함께 어우러지며 눈물바다를 만든다.


선리기연의 역대급 엔딩


본 포스트에서는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의 진지한 장면만 추려서 이야기했기에,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진지한 사랑이야기구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장면들 이외의 장면은 배꼽 빠지게 웃긴 장면들이 이어진다. 특히 당삼장의 개그는 역대급이다.


가벼우면서도 진지한, 웃기면서도 아련한 영화가 보고 싶다면. 아직 주성치의 서유기를 보지 않았다면 이 가을에 한 번 보는 것은 어떨까. 월광보합 초반 장면만 순조롭게 넘어간다면 또 하나의 인생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TMI) 서유기에서 주성치가 연기한 지존보는 처음에는 백정정을 사랑하지만 진실된 사랑은 자하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주성치는 서유기를 찍을 당시 자하 역을 했던 주인과 연인 관계였지만 영화를 통해 백정정 역을 한 막문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와 반대되는 경로를 걸으며 주인을 걷어 찬 주성치 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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