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폭싹 속았수다', 우리 시대가 다시 꺼내든 '토지'

세대를 뛰어넘는 가족 서사의 힘

by 오후한시오분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이어지는 사랑과 부모의 희생이 여전히 우리 마음을 깊이 울린다는 점이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가 한 시대를 사로잡았다면, 지금은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가 전 세대의 공감을 얻고 있다. 시대와 매체는 달라도, 이 두 작품은 인간의 삶과 가족, 그리고 세대를 잇는 사랑의 가치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가족의 의미; 시대를 관통하는 서사


『토지』는 1897년부터 1945년까지의 격변하는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민족의 한과 강인한 생명력을 주제로 다룬다. 또 그 한 켠에서는 한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짚는다. 농업이 삶의 중심이었던 시절, 가족은 생존과 노동의 공동체였다.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아가며, 서로의 삶을 책임지는 유기체였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할 인물 중 하나인 용이는 세 세대를 아우르는 삶을 통해 가족 서사의 축을 이룬다. 무당 월선과의 사랑, 임이네와의 동거, 그리고 아들 홍이의 성장을 통해 그는 세대 간 사랑과 희생의 복잡한 감정을 품는다. 용이는 말년에 평사리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하지만, 그가 남긴 사랑과 상처, 헌신은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의 이야기는 곧 근대사의 흐름 속에서 가족이 겪은 상처와 회복의 기록이기도 하다.


『폭싹 속았수다』는 1950년대 제주에서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세 세대의 삶을 그린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가족의 형태가 달라졌음에도, 이 드라마는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가족의 본질’을 따뜻하게 되새긴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 부모의 헌신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며, 잊고 지냈던 전통적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운다.

대하소설 '토지' /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부모의 희생; 세대를 잇는 사랑의 연결고리


두 작품 모두 부모의 희생을 핵심 주제로 다룬다. 『토지』에서 최서희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난을 감내하며, 용이 역시 아들 홍이를 위해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낸다. 월선의 죽음 이후 그는 홍이를 보살피며, 자신보다 자식의 삶이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결국 홍이는 성장해 허보연과 결혼하고, 딸 이상의를 낳으며 새로운 세대를 이끌게 된다.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이 같은 부모의 헌신은 핵심적인 정서다. 광례는 딸 애순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가고, 애순은 자신이 가진 꿈을 접으면서까지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꿈을 꾼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꿈을 내려놓을 때의 아픔을 알 것이다. 이 드라마는 그 아픔을, 따뜻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짚어낸다. 특히 애순이라는 인물이 세 배우를 통해 연기된다는 점은 인상 깊다. 김태연, 아이유, 문소리가 연기하는 애순은 '성장'과 '포기', 그리고 '수용'이라는 삶의 단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부모로 살아가는 일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를 말없이 증명한다.


세대 간의 관계와 상처의 전이


가족은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때로는 가장 큰 상처를 주고받는 공간이기도 하다. 『토지』에서 홍이는 어머니 월선의 죽음을 계기로 비뚤어지고,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는 인물이 되지만, 결국은 자신의 가족을 이루며 다시금 사랑을 배워간다. 이처럼 세대 간의 트라우마는 반복되기도 하지만, 치유의 가능성 또한 남겨진다. 특히, 용이가 중풍으로 쓰러진 후 평사리로 돌아와 아들 홍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얽매이서 사는 것은 내 하나로 끝내는 기다. 니 뜻대로 한분 살아보아라. 내 핏줄인데 설마 니가 나쁜 놈이야 되겄나…."라고 말한다. 용이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이 얽매였던 운명과 책임에서 벗어나, 홍이는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장면이다. 광례가 애순에게 그랬던 것과 같이.


『폭싹 속았수다』는 광례, 애순, 금명으로 이어지는 세 여성을 통해 이 같은 상처와 회복의 서사를 더욱 섬세하게 그려낸다. 부모의 상처가 자식에게 어떻게 전이되고, 그것이 또 어떻게 다시금 사랑과 이해로 치유되는지를 진심 어린 연기로 담아낸다. 광례는 숨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도 딸에게 "난 금명이는 다 했으면 좋겠어. 다 갖고, 다 해 먹고, 그냥 막 펄펄 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꿈을 딸에게 물려준다. 그래서 특히 애순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나는 내 부모를 얼마나 이해했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은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현대 사회에서의 의미; 잊혀가는 가치의 재발견


『폭싹 속았수다』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이유는, 바로 오늘날 우리가 점점 잃어가는 가치들을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가족의 해체, 1인 가구의 증가, 저출산…. 지금 우리의 사회는 '가족'이라는 말이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중한 것, 바로 ‘서로를 위한 삶’을 잊지 말자고 조용히 말해준다.


우리 모두는 완전히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있었고, 그 부모에게도 부모가 있었고, 연인과 친구, 이웃이 있었다. 아프리카 속담처럼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바로 그 ‘마을’의 의미를 되살린다. 관식과 애순이 세 들어 살 때 몰래 밤마다 빈 쌀독을 채워주던 옆집의 할머니도 "고찌 글라, 고찌 가. 고찌 글민 백리 길도 십 리 된다. (같이 가라, 같이 가. 같이 가면 백리 길도 십리 된다.)"라고 말한다.


시대를 초월한 가족 서사의 힘


『토지』와 『폭싹 속았수다』는 시대도, 매체도 다르지만 결국 같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가족의 의미, 부모의 희생, 세대를 잇는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는 어느 시대에나 통한다. 『토지』가 한국 근대사의 거친 물결 속에서 그 가치를 품어냈다면, 『폭싹 속았수다』는 현대 사회의 균열 속에서 그 의미를 따뜻하게 끌어안는다.


결국 삶은, 누군가의 헌신과 사랑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기대어 성장했고, 또 누군가에게 기대를 주며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토지』는 그 시대의 ‘토지’였고, 『폭싹 속았수다』는 지금 우리의 시대가 다시금 꺼내든 ‘토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