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극장, 협업과 담합 사이

7장 신들의 무대에서 벌어진 인간의 욕망

by 오후한시오분

디오니소스 신을 기리는 축제의 무대에서 울려 퍼지는 찬란한 합창과 비극의 선율 뒤에는 1장의 무라노 유리공예 길드나 5장의 현대 미술 경매장과 놀랍도록 유사한 경쟁과 담합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벌어진 비극 경연대회는 단순한 예술 행사를 넘어 폴리스 간 자존심 대결의 장이자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이익이 복잡하게 얽힌 권력의 무대였습니다. 이 장에서는 고대 그리스 연극계에서 나타난 초기 형태의 담합과 공동행위가 어떻게 예술의 순수성을 훼손했는지, 그리고 이것이 현대 경쟁법의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디오니시아 축제의 이중성


아테네의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는 매년 3월 말에 열려 며칠간 지속되는 그리스 세계 최대의 문화행사였습니다. 이 축제는 표면적으로는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치는 신성한 의식이었지만 실제로는 아테네의 부와 문화를 과시하는 정치적 선전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축제의 핵심인 비극 경연대회에는 1년에 걸친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최종 3명의 비극 작가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각 작가는 하루 동안 3편의 비극과 1편의 풍자극을 무대에 올려야 했습니다.


이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은 단순한 예술적 영예를 넘어 정치적 승리를 의미했습니다. 기원전 468년 소포클레스가 아이스킬로스와의 비극 경연에서 승리한 사건은 이러한 정치적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승자 선정은 원래 제비 뽑기로 선출된 심사위원이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날만큼은 정치지도자 키몬과 다른 정치지도자들이 직접 소포클레스를 우승자로 뽑았습니다. 이는 예술적 판단보다는 정치적 고려가 우선된 명백한 심사 조작 사례였습니다.

▲ 디오니소스 극장, 그리스 아테네 / 퍼블릭 도메인

심사위원 제도 자체도 담합의 온상이었습니다. 심사위원단은 선거권이 있는 아테네 시민 중 무작위로 선정된 10명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제로는 후원자들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공연 후 각자 서판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순서대로 세 편의 비극 제목을 적고 열 개 서판 중에서 다섯 개를 뽑아 수를 세는 방식으로 우승자를 결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후원자들의 로비와 매수가 빈번하게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대 그리스 연극계의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코레고스(Choregos)' 시스템이었습니다. 코레고스는 돈 많은 후원자로서 합창대 편성, 의상 제작비 등 공연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부담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유력 가문 출신의 귀족들로, 정치적 야심을 가진 이들이 시민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이 시스템은 2장에서 다룬 메디치 가문의 배타적 후원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였습니다. 코레고스들은 특정 작가와만 독점적 관계를 맺어 다른 후원자들의 접근을 차단했고, 이로 인해 재능 있는 신진 작가들은 중요한 기회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되었습니다. 기원전 476년 테미스토클레스가 코레고스가 되어 프뤼니코스의 '포이니케의 여인들'을 후원한 사례는 정치적 목적과 예술 후원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 고대 그리스 연극계의 코레고스 시스템과 그로 인한 예술적 자유의 제한을 묘사한 이미지 / AI 생성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코레고스들 간의 담합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는 대신 암묵적으로 영역을 분할하여 특정 작가나 장르를 독점하는 관행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현대 경쟁법에서 금지하는 '시장 분할 담합'의 전형적인 사례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하고 창작의 다양성을 해쳤습니다.


2. 작가들의 은밀한 연대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사이에도 미묘한 협력과 견제의 관계가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리스 신화 속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때로는 경쟁을 제한하는 암묵적 합의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이 특정 주제나 신화적 소재에 대해 시기를 조정하는 관행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경우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왕'을 발표한 후 상당 기간 다른 작가들이 같은 소재를 다루지 않는 암묵적 유예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는 현대 경쟁법에서 말하는 '공동행위(Concerted Practices)'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행은 단순한 예술적 예의를 넘어 시장 지배력 유지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기존 작가들은 신진 작가들이 검증된 소재로 성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기 있는 신화적 소재에 대한 사실상의 독점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1장의 무라노 유리공예 길드가 기술 비밀을 독점했던 것과 유사한 진입 장벽 구축 전략이었습니다.

▲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 AI 생성

앞서 설명한 대로 심사위원 매수와 로비는 고대 아테네 디오니시아 축제에서 우승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심사위원은 선거권이 있는 아테네 시민 중 무작위로 선발된 10명으로 구성되었으나 실제로는 후원자(코레고스)나 정치적 이해관계자들의 영향력에 따라 심사 결과가 조작될 수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공연이 끝난 뒤 각자 서판에 마음에 드는 작품 순위를 적어 제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특정 작가나 공연에 유리하도록 심사위원을 설득하거나 금전적 대가를 주는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정치적 갈등이나 도시 국가의 체면이 걸린 사안에서는 심사위원에게 직접적인 압력이 가해지거나 공연 자체가 금지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프뤼니코스의 밀레토스 함락’ 사건처럼 작가가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루자 심사위원이나 행정관의 판단에 따라 공연이 금지되고 벌금이 부과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심사위원 매수와 로비는 현대의 경쟁법에서 금지하는 담합이나 불공정 경쟁과 유사하게 공정한 평가 체계를 훼손하고 예술의 다양성과 자유로운 창작을 저해하는 대표적인 부정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 밀레토스의 함락 (A.카스타뉴 作) / 퍼블릭 도메인

이는 4장에서 다룬 1950년대 미국 음악 산업의 '페이올라(Payola)' 관행과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였습니다. 당시 라디오 DJ들에게 금전적 대가를 지불해 특정 음반을 방송하게 하는 관행이 문제가 되었듯이 고대 그리스에서도 후원자들이 심사위원들에게 뇌물을 제공하거나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러한 관행이 제도화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사위원들은 표면적으로는 무작위로 선출되었지만 실제로는 후원자들의 네트워크 안에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작가를 지지하거나 배제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예술적 우수성보다는 정치적 연줄이 성공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3. EU 항공 카르텔과의 유사성


고대 그리스 연극계의 담합 양상은 현대의 유럽연합(EU) 항공 카르텔 사건과 놀라운 유사점을 보입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010년과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에어캐나다(Air Canada), 에어프랑스(Air France), KLM, 마르티네어(Martinair), 브리티시 에어웨이즈(British Airways), 카르고룩스(Cargolux),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 일본항공(Japan Airlines), LAN 항공(현재 LATAM), 스칸디나비아 항공(Scandinavian Airlines), 싱가포르 항공(Singapore Airlines) 등 11개 항공사가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연료비 및 보안 할증료를 담합한 혐의로 총 7억 7,600만 유로의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항공사들은 프랑크푸르트, 취리히, 홍콩 등지의 '가격 회의(price-fixing meetings)'와 이메일·팩스를 통해 유류할증료 최소 수준 합의, 보안할증료 도입 및 인상 시기 공조, 운송주선인에게 지급하던 커미션 일괄 중단 등을 결정했습니다. 심지어 '서클(circle)'이라 불리는 내부 연락망을 만들어 주 단위로 할증료 변동 계획을 공유하면서 시장이 요구하는 경쟁 가격을 선제적으로 차단했습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작가들이 후원자들과 함께 심사 결과를 조작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양쪽 모두 '공동행위(Concerted Practices)'의 특징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EU 경쟁법에서 공동행위는 "기업들 간의 명시적 합의 없이도 경쟁의 위험을 실질적 협력으로 대체하는 조정 행위"로 정의됩니다. 고대 그리스 작가들과 후원자들 사이의 암묵적 협력도 이와 같은 성격을 띠었습니다.


루프트한자가 카르텔을 당국에 신고하여 면책을 받은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서도 내부 고발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이스킬로스가 정치지도자들의 후원을 잃고 시칠리아로 이주한 사건은 이러한 권력 게임에서 밀려난 결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항공 카르텔 사건을 표현한 이미지 / AI 생성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서로 다른 정치 체제와 문화를 바탕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정과 스파르타의 과두제는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문화적 헤게모니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였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연극계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각 도시국가는 자신들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최고의 작가와 후원자를 확보하려 했습니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통해 해상 제국을 구축한 것처럼 연극계에서도 아테네는 디오니시아 축제를 통해 문화적 지배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다른 폴리스의 작가들이 아테네 시장에 진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장벽으로 작용했습니다. 마치 3장에서 다룬 륄리의 파리 오페라 독점과 같은 방식으로, 아테네는 법적, 제도적 수단을 동원하여 문화적 독점을 유지했습니다.


4. 예술의 순수성 vs 정치적 도구화


고대 그리스 연극의 담합 문제는 예술의 순수성과 정치적 도구화 사이의 근본적 갈등을 보여줍니다. 플라톤이 민주정의 아테네를 "부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돈벌이 이외의 다른 것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비판한 것처럼 연극계도 예술적 가치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병폐를 보였습니다.


이는 6장에서 다룬 현대 AI 예술 시장의 알고리즘 담합과 유사한 구조적 문제입니다. 빅테크 기업들이 데이터 독점을 통해 AI 예술 시장을 지배하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서도 소수의 권력자들이 예술 시장을 조작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했습니다.

▲ 공정한 경쟁과 시장 환경을 표현한 이미지 / AI 생성

고대 그리스 연극계의 담합 사례는 현대 예술 시장에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첫째, 후원 시스템의 투명성 확보가 필요합니다. 코레고스 시스템처럼 소수의 후원자가 시장을 지배하는 구조는 필연적으로 담합과 불공정 경쟁을 낳습니다. 둘째, 심사 및 평가 시스템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예술적 판단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신진 예술가들의 시장 진입 기회를 확대해야 합니다. 기존 작가들의 소재 독점이나 후원자 네트워크 배제는 예술의 다양성을 해치는 반경쟁적 행위입니다. 넷째, 국제적 공조를 통한 규제 강화가 필요합니다. EU 항공 카르텔 사건에서 보듯이 현대의 담합은 국경을 넘나들며 이루어지므로 국제적 차원의 대응이 필수적입니다.


무라노의 반짝이는 유리잔에서 시작된 우리의 여행은 고대 그리스의 장엄한 비극 무대에서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신들을 찬양하는 신성한 합창 뒤에 숨겨진 인간의 욕망과 권력 게임은 시대를 초월하여 예술과 시장, 창의성과 경쟁이 만나는 지점에서 반복되는 영원한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예술의 번영은 공정한 경쟁과 투명한 시장 환경에서만 가능함을 고대 그리스의 교훈이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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