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합의 검은 변주곡

제 9장 악보에서 라면까지, 보이지 않는 손의 배신

by 오후한시오분

1855년 미국의 어느 중산층 가정, 갓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소녀가 거실에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녀의 앞에는 당시 유행하던 스티븐 포스터의 멜로디가 담긴 악보 한 장이 놓여 있습니다. 가족들은 그 선율에 미소 짓고, 평화로운 저녁이 깊어갑니다. 하지만 그 순수해 보이는 악보 한 장 뒤에는 미국 전역의 음악 시장을 좌우하던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었습니다. 경쟁의 자유로운 선율 대신 독점이라는 불협화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19세기 악보 출판사들의 은밀한 카르텔을 통해 '가격 담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또 21세기 디지털 서점의 가격 조작, 그리고 우리 식탁 위의 라면값 담합까지 시대와 무대를 넘나들며 소비자의 주머니를 노려온 '가격 담합'의 역사를 추적해 봅니다.


1. 악보 위의 카르텔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악보 산업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수많은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악보를 찍어내며 할인과 덤핑을 일삼았고 이는 출판사들의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파멸적인 경쟁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혼란을 끝내기 위해 1855년 미국 내 25개의 주요 악보 출판사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음악 거래 위원회(Board of Music Trade of the United States)'라는 이름의 카르텔을 결성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가격을 안정시켜 공멸을 막는다." 이를 위해 그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강력한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미국 악보 산업의 카르텔 형성을 묘사한 이미지 / AI 생성

첫째는 공동 정가표의 작성입니다. 모든 회원사는 위원회가 정한 가격표에 따라 악보를 판매해야 했습니다. 이는 각 출판사가 자유롭게 가격을 정할 수 있는 권리를 완전히 박탈하는 조치로, 소비자 역시 가격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악보 시장에서는 경쟁이 사라지고 소비자는 어디서나 같은 가격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둘째는 할인 및 리베이트 금지입니다. 소매상이나 유통업체에게 어떠한 형태의 가격 할인도 제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규정은 시장 내 가격 경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소비자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출판사들은 소매상에게 특별한 혜택이나 보상도 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소매상들도 더 싸게 악보를 공급받을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셋째는 강력한 제재입니다. 규칙을 어긴 회원사나 비협조적인 소매상은 즉시 공급이 중단되는 '집단 보이콧'을 당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경고를 넘어 위반자에게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히는 강력한 억제책이었습니다. 카르텔의 규율을 유지하고 담합 행위를 강제하는 핵심 수단으로 작용했으며 위반을 막기 위한 실질적 공포의 장치였습니다.


이 카르텔은 30년 넘게 미국 악보 시장을 지배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질서 정연했지만 그 속에서는 경쟁이라는 시장의 심장이 멎어 있었습니다. 뉴욕의 부유한 가정부터 서부 개척지의 작은 마을까지, 모든 미국인은 똑같은 가격표가 붙은 악보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규 출판사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에 진입할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습니다.


2. 가격 담합, 경쟁법의 제1계명


경쟁법의 세계에서 '가격 담합(Price Fixing)'은 가장 무거운 죄로 취급됩니다. 이는 마치 스포츠 경기에서 승부조작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수(기업)들이 미리 짜고 결과를 정해버리면 경기의 공정성은 사라지고 팬(소비자)들은 기만당하게 됩니다. 가격 담합은 이처럼 시장 경제의 가장 근본적인 신뢰를 깨뜨리는 행위입니다.

가격 담합의 심각성을 묘사하는 이미지 / AI 생성

자유 시장의 핵심 원리는 간단합니다. 기업들은 더 좋은 품질, 더 나은 서비스, 그리고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합니다.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효율성이 높아지며 그 혜택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나 가격 담합은 이 모든 과정을 단칼에 무너뜨립니다. 경쟁사들이 서로 싸우는 대신 악수를 하고 "우리 다 같이 이 가격 밑으로는 팔지 맙시다"라고 약속하는 순간 시장은 경쟁의 장이 아닌 약탈의 장으로 변질됩니다.


이 때문에 경쟁법은 가격 담합을 '그 자체로 위법'하다고 봅니다. 이는 "우리가 가격을 합의해서 시장이 더 안정됐어요" 또는 "경쟁이 너무 과열돼서 어쩔 수 없었어요" 같은 변명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경쟁자 간에 가격을 합의하는 행위 그 자체가 범죄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1890년 미국에서 제정된 최초의 경쟁법인 셔먼법(Sherman Act) 제1조는 이러한 가격 담합 계약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며 현대 경쟁법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가격 담합이 시장과 사회에 미치는 해악은 명백하고 파괴적입니다. 담합은 인위적으로 가격을 부풀려 소비자의 지갑을 직접적으로 털어갑니다. 소비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혜택, 이를 테면 더 낮은 가격을 기업들이 부당하게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물건값이 비싸지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의 부가 소비자에게서 담합 기업으로 불공정하게 이전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또 가격 경쟁이 사라지면 기업들은 더 이상 혁신에 투자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거나 생산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약속된 높은 가격에 안주하게 됩니다. 결국 시장은 활력을 잃고 산업 전체의 발전이 정체되는 '자중손실(Deadweight Loss)'이 발생합니다. 시장이 최적의 균형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발생하는 경제적 효율성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강력한 카르텔은 새로운 경쟁자가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신규 기업이 더 저렴하고 혁신적인 제품으로 도전하려 해도 담합 기업들이 똘똘 뭉쳐 이를 막아서기 때문입니다.

가격 담합이 시장과 사회에 미치는 해악을 묘사하는 이미지 / AI 생성

이처럼 가격 담합은 소비자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고, 시장의 혁신 동력을 꺼뜨리며, 경제 전체를 병들게 하는 '반경쟁 행위의 제1계명'입니다. 19세기 악보 카르텔이 보여주었듯 이러한 행위는 경쟁 당국이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자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시장의 암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3. 디지털 시대의 공모


한 세기 반이 흐른 2010년, 담합의 무대는 종이 악보에서 디지털 스크린으로 옮겨졌습니다. 당시 전자책 시장은 아마존의 '킨들(Kindle)'이 9.99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출판사들은 이러한 가격 정책이 자신들의 수익을 갉아먹고 책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며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와 아이북스 스토어(iBooks Store, 현재의 북스토어)를 들고 등장합니다.

아마존의 킨들 관련 서적 / 홈페이지 캡처

첫째는 에이전시 모델(Agency Model)입니다. 기존 아마존의 '도매 모델(Wholesale Model)'과 달리 에이전시 모델에서는 출판사가 직접 전자책의 소매가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애플은 단순히 플랫폼 역할만 하며 판매액의 30%를 수수료로 가져가고 출판사는 나머지 70%를 받게 됩니다. 이 모델은 표면적으로는 출판사에게 가격 결정권을 부여해 자율성을 높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는 출판사가 가격을 올릴 유인이 커지고 소매가격이 자연스럽게 상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애플이 왜 이 모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출판사 간 경쟁이 약할 때 플랫폼이 가격 결정권을 넘기면 가격이 오를 수 있다"라고 분석합니다. 둘째는 최혜국 대우 조항(MFN Clause, Most-Favored-Nation Clause)입니다. 이 조항은 "만약 다른 곳(아마존 등)에서 우리 서점보다 더 싸게 팔면 그 가격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애플이 항상 최저가를 보장받게 해주는 조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판사들이 아마존 등 다른 플랫폼에서도 가격을 낮출 수 없도록 묶는 역할을 했습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애플의 서점에서만 가격을 올리고 아마존에서는 그대로 두면 애플의 MFN 조항 때문에 애플 서점의 가격도 자동으로 내려가게 되어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출판사들은 아마존에도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전자책 가격은 전반적으로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북스(iBooks)를 소개하는 스티브 잡스 / 유튜브 pi1.com

이 두 가지 조항이 결합되면서 출판사들은 아마존의 9.99달러 전략을 포기하고 12.99~14.99달러로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플의 에이전시 모델과 MFN 조항은 출판사들이 아마존에게도 가격 인상을 강요하게 만들었고 결국 전자책 시장 전체에서 가격이 치솟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법원은 이 구조가 출판사 간 공모와 가격 담합을 유도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이 사건은 악보 카르텔보다 한층 더 교묘했습니다. 애플은 플랫폼 사업자로서 직접 가격 담합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에이전시 모델'과 '최혜국 조항'이라는 장치를 통해 출판사들이 담합을 하도록 판을 깔아준 설계자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미국 법무부는 이들을 제소했고 오랜 법정 다툼 끝에 법원은 애플과 출판사들의 공모를 인정하여 총 5억 6,6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소비자에게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4. 라면값의 진실


이러한 담합은 먼 나라의 이야기나 거대 IT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가장 서민적인 음식, 라면에도 담합의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는 농심, 삼양, 오뚜기, 한국야쿠르트 등 국내 라면 4사가 2001년부터 10년간 총 6차례에 걸쳐 가격 인상 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담합을 벌였다고 발표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 보도자료 발췌

이들은 직접 만나 가격을 합의하는 공식적인 회의를 열지는 않았지만 언론과 영업 담당자들을 통해 서로의 가격 인상 계획과 시기, 인상 폭 등 민감한 정보를 주고받았습니다. 한 회사가 가격 인상을 발표하면 나머지 회사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뒤따라 가격을 올리는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당시 시장 상황을 보면, 농심이 압도적인 1위 업체였기 때문에 농심이 가격 인상을 하면 나머지 업체들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관행이 오래전부터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공정위는 묵시적 담합이 있었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라면업체들에 대해 1,300억 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하지만 2015년 대법원은 "직접적인 합의의 증거가 부족하다"라며 공정위의 처분을 취소했습니다. 당시 시장 내 1위 사업자인 농심이 가격을 올리면 다른 업체들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관행이 있었고 이는 합의 없이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현상이라고 보았습니다. 대법원은 담합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사업자 간 의사소통의 상호성, 즉 명확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 판결문 (2013두25924 과징금 등 처분 취소청구)

특히 대법원은 자진신고자 측 진술이 이미 숨진 임원의 전언이고 내용도 구체적이지 않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농심이 가격 인상을 주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 정도는 있었을 수 있지만 이는 명확한 합의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각 업체의 가격 인상 시기와 인상 폭에는 미세한 차이도 있었고, 일부 업체는 가격 인상 시기를 늦추거나 유통망에 별도의 재정지원을 하며 경쟁을 시도한 사정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대법원은 담합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5. 보이지 않는 손의 배신을 막기 위하여


19세기 악보 시장을 지배했던 노골적인 카르텔부터 21세기 디지털 플랫폼의 교묘한 가격 조작, 그리고 우리 일상의 라면값에 이르기까지 '가격 담합'은 시대와 기술에 따라 모습을 바꿀 뿐 그 본질은 같습니다. 바로 경쟁을 배신하고 소비자의 이익을 빼앗는 행위라는 점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오직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보장될 때만 시장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끕니다. 담합은 이 보이지 않는 손을 묶어버리는 족쇄와 같습니다. 이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법 집행과 감시가 필수적입니다.

AI 생성

기업들에 가격 담합은 반드시 처벌받을 수 있다는 명확한 신호를 주어야 하며 특히 애플의 사례처럼 플랫폼 사업자가 담합의 판을 까는 행위에 대해서는 더욱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또한 내부 고발자 보호 제도를 활성화하여 은밀한 공모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통해 '담합으로 얻는 이익보다 적발 시 손해가 훨씬 크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멜로디의 가격, 이야기의 가격, 한 끼 식사의 가격은 기업들의 비밀스러운 악수가 아닌 시장의 투명한 경쟁을 통해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공정한 가격으로 문화를 즐기고, 건강한 시장 경제의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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