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정보교환 담합의 숨겨진 역사
1382년 플랑드르 지방의 상업 도시 안트베르펜. 석조 건물들로 둘러싸인 그로테 마르크트 광장에서는 매일 아침 상인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메아리쳤습니다. 하지만 그 번영의 이면에는 다른 종류의 거래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성 루가 길드(Guild of Saint Luke)의 회원들이 분기별 총회와 특별회의 때마다 저녁 길드 회관에 모여 나누는 것은 단순한 동업자 간의 안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고객 정보, 작품 가격 등을 세세하게 공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중세와 근세 유럽에서 벌어진 정보교환을 통한 담합의 원형을 살펴보고 현대 디지털 시대까지 이어지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탐구해 보겠습니다. 안트베르펜 화가 길드와 런던 인쇄 길드의 은밀한 정보공유에서 시작하여 21세기 우리나라 은행권의 LTV 정보교환 사건까지, 시대를 초월한 정보교환 담합의 실체를 추적해 봅니다.
안트베르펜의 성 루가 길드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가, 조각가, 세밀화가 등 예술가들의 신앙 공동체였지만, 실제로는 예술 시장을 체계적으로 통제하는 경제적 카르텔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길드는 도시 당국으로부터 예술 작품의 판매와 거래를 독점적으로 관리할 권한을 부여받았고 회원이 아니면 작품을 팔거나 제자를 둘 수도 없었습니다. 길드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예술계의 최신 동향과 민감한 정보를 활발히 교환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정보 공유는 바로 고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이 대형 제단화를 주문했다는 소식이 들어오면 이 정보는 곧바로 길드 내부에 퍼졌습니다. 그러면 다른 회원들은 같은 주문에 경쟁적으로 입찰하기보다는 서로 가격을 높게 유지하거나 아예 입찰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장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고객 정보의 공유는 길드 회원들끼리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고 모두가 적정한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안료나 기법, 그리고 값비싼 재료의 가격과 공급처에 대한 정보도 길드 내에서만 공유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최고급 안료였던 청금석이나 금박을 어디서, 얼마에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외부인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정보의 독점은 길드 회원이 아닌 외부 예술가들의 시장 진입을 어렵게 만들었고 길드의 힘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더불어 길드는 각 후원자들의 취향, 지불 능력, 협상 스타일 등 세밀한 정보까지 체계적으로 모으고 공유했습니다. 이는 마치 현대 기업들이 고객 관리 시스템(CRM)을 통해 고객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습니다. 덕분에 길드 회원들은 주문을 받을 때마다 후원자의 성향에 맞춰 작품을 제안하거나 가격을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의 대표적 수혜자가 바로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 페터 파울 루벤스였습니다. 루벤스는 안트베르펜 시장이자 길드 조합장이었던 니콜라스 로콕스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중요한 프로젝트 정보를 남보다 먼저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루벤스가 대형 제단화나 주요 공공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길드 내 정보 네트워크의 중심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그의 작업실은 길드 전체의 정보 교환의 허브였고 여기서 나온 정보는 곧 길드 전체의 가격 정책과 시장 전략을 좌우했습니다.
이처럼 길드는 예술가들의 협동조합이자 동시에 시장을 통제하고 경쟁을 제한하는 강력한 정보 네트워크였습니다. 이런 구조 덕분에 회원들은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지만 동시에 외부 예술가들에게는 높은 진입 장벽이 되었고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보교환 담합은 겉으로 보기에는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경쟁을 약화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회사가 서로 가격, 고객 정보, 판매 전략 등 민감한 정보를 주고받게 되면 각 회사는 상대방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가격을 낮추거나 더 좋은 조건을 내세워 경쟁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다양한 선택지와 더 나은 조건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시장 전체의 활력도 떨어집니다.
또한 정보교환은 기존 사업자들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진입 장벽을 만듭니다. 이미 시장에 자리 잡은 기업들끼리만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면 새로 진입하려는 기업은 시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마치 동네에 오래된 상점들만 서로 손님 정보를 공유하며 신참 가게의 손님 유치 기회를 막는 것과 비슷합니다.
더 나아가 정보교환이 일상화되면 기업들은 혁신을 추구할 동기를 잃게 됩니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안정적으로 수익을 나눠 갖는 구조가 굳어지면 굳이 새로운 기술이나 상품을 개발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지는 겁니다. 결국 시장에는 신선한 변화가 줄고, 소비자들은 더 좋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접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이처럼 정보교환 담합은 단순히 정보를 나누는 차원을 넘어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과 혁신을 가로막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경쟁법은 경쟁사들끼리의 민감한 정보교환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4대 은행의 담보인정비율(LTV) 정보교환 사건은 중세 안트베르펜 화가 길드의 정보공유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KB국민은행, 하나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은 수년간 약 7,500개의 개별 부동산 물건별 LTV 정보를 정기적으로 공유해 왔고 이로 인해 각 은행의 대출 전략이 서로에게 노출되면서 경쟁이 약화됐다는 것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시각입니다. 공정위는 이러한 정보교환이 은행 간의 암묵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 더 불리한 대출 조건을 강요하는 시장 지배력을 강화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공정위와 은행권의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LTV 정보가 과연 '경쟁상 민감한 정보'인지 여부입니다. 공정위는 이 정보가 대출 한도와 금리 등 핵심 조건을 결정하는 만큼 매우 민감하다고 보지만 은행들은 해당 정보가 이미 공개되어 있거나 실질적으로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정보공유가 실제로 시장 경쟁을 제한했는지, 즉 은행들이 공유한 정보를 근거로 LTV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추고 소비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제공했는지가 핵심입니다. 셋째, 이러한 정보교환을 통해 은행들이 부당이익을 얻었는지, 그리고 소비자 피해가 실제로 발생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공정위는 LTV가 낮아질수록 소비자는 더 많은 신용대출을 써야 하고, 그만큼 이자 부담이 커져 피해를 본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은행들은 LTV 외에도 신용등급,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다양한 요인이 대출 조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단순히 LTV 정보만으로 소비자 피해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2020년 공정거래법 개정 이후 '정보교환 담합'을 처음으로 적용하는 사례로, 제재 수위와 법적 판단이 향후 유사 사건의 기준이 될 전망입니다. 공정위는 2024년 11월 재심사 명령을 내린 뒤 2025년 2월부터 추가 현장조사와 증거 보강을 거쳐 4월에 각 은행에 심사보고서를 발송했습니다. 앞으로는 각 은행의 의견을 청취하는 전원회의와 추가 검토 절차가 이어질 예정이며 최종 결론은 2025년 안에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공정위가 위법성을 인정하면 4대 은행에는 조 단위의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은행권은 이미 대형 로펌을 선임해 행정소송을 준비하는 등 결론이 나더라도 법적 다툼이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은행과 감독기관의 갈등을 넘어 정보교환의 범위와 한계, 소비자 보호와 시장 경쟁의 균형이라는 중요한 경쟁법적 쟁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정보교환 담합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의 발전으로 기업의 정보 수집과 분석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되면서 담합의 방식 또한 훨씬 더 교묘하고 정교해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경쟁사들이 담합을 하려면 정기적인 비밀 회합을 통해 정보를 교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만남'이 필요 없습니다. 온라인 플랫폼이나 전문 소프트웨어를 통해 경쟁사의 가격 변동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심지어 자사의 가격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알고리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경쟁사들이 24시간 내내 서로의 가격표를 감시하며 눈치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직접적인 대화나 합의가 없더라도 알고리즘이 서로의 가격을 따라가면서 결과적으로는 모든 기업이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담합 효과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쿠팡은 실제로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반의 '다이내믹 프라이싱(Dynamic Pricing)'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실시간으로 가격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쿠팡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알고리즘을 통해 시장의 수요와 공급, 경쟁업체의 가격 변동, 특정 상품의 재고 상황, 고객의 구매 이력, 검색 기록, 시즌별 수요 변화 등 다양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쿠팡은 같은 상품이라도 구매 시점이나 상황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책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쟁 온라인 쇼핑몰에서 특정 상품의 가격이 내려가면 쿠팡의 시스템도 이를 즉시 감지해 가격을 내릴 수 있고 반대로 수요가 급증하거나 재고가 부족해지면 가격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정보교환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사실상 정보를 교환한 것과 유사한 외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AI 알고리즘이 24시간 내내 시장 상황을 감시하고 자동으로 가격을 조정하는 구조는 과거처럼 사람들끼리 모여 가격을 의논하던 담합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실시간 자동화된 경쟁'입니다
또한 제3의 플랫폼이나 시장조사 기관을 통한 '간접적 정보교환'도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기업이 특정 데이터 분석 업체에 자사의 판매량, 재고, 가격 정책 등 민감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 업체가 취합·분석한 데이터를 다시 받아보는 방식입니다. 이는 마치 경쟁사들끼리 '공동의 비밀 정보원'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 법무부(DOJ)는 2024년 이러한 간접적 정보교환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반독점법 위반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며 규제의 고삐를 죄고 있습니다.
정보교환 담합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전 예방이 핵심입니다. 과거 안트베르펜 화가 길드가 은밀하게 정보를 주고받으며 시장을 통제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기업들은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며 경쟁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이런 폐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시장을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이상 징후를 조기에 감지하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마치 도시의 야경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경쟁당국은 정기적으로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가격이나 조건이 비정상적으로 비슷해지는 현상이 나타나면 즉시 조사에 착수해야 합니다.
기술의 발전은 담합의 수법을 더 정교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대응책도 제공합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분석 기술을 활용하면 사람이 눈치채기 어려운 미묘한 가격 변화나 시장 패턴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천 개 상품의 가격이 한꺼번에 비슷하게 움직이는 현상이 반복된다면 AI는 이를 신속하게 경고 신호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도입해 담합의 씨앗이 싹트기 전에 뽑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기업 내부의 자정 노력도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임직원이 경쟁법의 원칙과 위험성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정기적인 교육과 모니터링 시스템을 갖추어야 합니다. 단순히 법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 정보교환이 어떤 상황에서 위법이 될 수 있는지 실제로 어떤 피해가 발생하는지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직원들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위험한 행동을 반복하지 않게 됩니다.
무엇보다 기업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업계 전체가 정보를 나누며 '적당히' 시장을 나누는 것이 당연한 관행처럼 여겨졌지만 이제는 공정경쟁이야말로 장기적으로 기업의 성장과 혁신을 이끄는 힘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서로 경쟁하면서 더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소비자에게 더 큰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 결국 기업에도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안트베르펜의 길드 회관에서 시작된 정보의 그림자는 우리나라 은행의 비밀 모임을 거쳐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은행 회의실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6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정보를 독점하고 조작하려는 유혹은 여전히 시장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보교환은 더 은밀하고 정교해지지만 그로 인해 시장 경쟁이 훼손되고 소비자가 피해를 입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시장 경제의 발전은 단순히 정보가 많이 공개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참여자가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롯됩니다. 옛 화가들이 정보를 독점해 시장을 조작하려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투명성과 공정경쟁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문화적 풍요와 기술적 진보 역시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