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반복과 형태의 변화
무라노 섬의 반짝이는 유리잔에서 시작된 우리의 여행이 이제 막을 내립니다. 베네치아의 작은 섬에서 피어난 투명한 아름다움부터 AI가 그려내는 디지털 캔버스까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예술사 속에 숨겨진 경쟁의 법칙들을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긴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놀라운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예술과 경쟁법이라는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영역이 실은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사실은 권력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패턴의 놀라운 일관성입니다. 15세기 무라노의 유리 장인들이 기술 비밀을 독점하며 유럽 시장을 호령했던 모습과 현재 빅테크 기업들이 AI 기술과 데이터를 독점하여 디지털 예술 시장을 좌우하는 모습 사이에는 50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있지만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 예술가들과 맺었던 배타적 후원 관계는 오늘날 CJ올리브영이 화장품 브랜드에게 강요했던 배타적 거래와 구조적으로 동일합니다. 륄리가 루이 14세로부터 받은 오페라 독점 특허장의 그림자는 현재 티켓마스터-라이브네이션이 미국 공연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모습 속에서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1950년대 록앤롤이 보여준 혁신의 역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 레코드와 같은 독립 레이블들이 기존 대형 음반사의 아성에 도전하며 음악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결국 대형 레이블들의 자본력과 유통망 앞에서 흡수되거나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이는 오늘날 K-팝 시장에서 중소 기획사가 겪고 있는 현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혁신은 변방에서 시작되지만 그 성과는 종종 기존 지배 세력에게 흡수되는 아이러니한 순환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수수료 담합 사건은 예술 시장에서 벌어지는 가격 조작의 치밀함을 보여주었고 고대 그리스 디오니소스 극장의 코레고스 시스템은 예술계 담합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예술과 권력, 그리고 시장 논리의 결합은 인류 문명사와 함께 시작된 오랜 숙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기술 발전이 경쟁 제한 행위의 양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입니다. 중세 무라노의 물리적 섬 격리에서 시작된 기술 독점은 근대의 법적 특허권을 거쳐 현재의 알고리즘과 데이터 독점으로 진화했습니다. AI 시대에는 창작 과정 자체가 알고리즘화되면서 전통적인 경쟁법 개념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시장 지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플랫폼이 예술 유통의 핵심 인프라가 되면서 과거 륄리의 왕실 특허장이나 무라노의 물리적 격리보다 훨씬 강력하고 은밀한 통제가 가능해졌습니다.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디지털 시대의 '보이지 않는 검열'은 과거 어떤 독점보다도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두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신호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피프티 피프티와 같은 중소 기획사의 글로벌 성공은 디지털 기술이 진입장벽을 낮추는 긍정적 역할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틱톡과 같은 새로운 플랫폼은 기존 유통 구조를 우회할 수 있는 혁신적 통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경쟁당국들의 인식 변화입니다. 미국 법무부가 라이브네이션을 상대로 제기한 반독점 소송, 유럽연합의 디지털서비스법, 우리나라 공정거래위원회의 플랫폼 규제 강화 등은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경쟁 질서를 만들어가려는 노력들입니다. 예술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려는 사회적 요구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술 창작자들 자신이 권리 의식을 높이고 불공정한 관행에 맞서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 고무적입니다. 과거 무라노의 유리 장인들이 섬을 떠날 수 없었던 '황금 감옥'과 달리 오늘날의 창작자들은 다양한 플랫폼과 수단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술과 경쟁법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는 같은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양성과 창의성이 자유롭게 꽃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경쟁법이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통해 추구하는 가치와 예술이 지향하는 창의적 표현의 자유는 서로 다른 길을 통해 같은 목표에 도달하려 합니다.
무라노의 유리 장인이 만든 찬란한 잔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히 그 기술적 완성도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투명한 벽 너머로 보이는 빛의 다채로운 굴절, 예측할 수 없는 색깔의 변화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술 시장도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나 자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당할 때가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이 공정하게 경쟁하고 협력할 때 가장 아름다운 창작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AI가 그려내는 디지털 아트의 시대에도 인간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보장하는 공정한 경쟁 환경이야말로 예술이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토양입니다.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며 미래의 예술 생태계가 소수의 독점이 아닌 다양성의 조화 속에서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라봅니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테이블을 비추는 이 시간, 예술과 경쟁법이라는 특별한 여행을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공정성과 창의성이 조화롭게 발전해 나가길 바라며 이 작은 글들이 그런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