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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 Jan 15. 2024

당신의 소원은 안녕한가요?

디즈니 <위시> 리뷰 - 아이들을 위한 동화 속에서 찾은 의미

1월 3일, 디즈니 100주년을 기념하여 애니메이션 영화 <위시>가 개봉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소원’을 주 소재로 다룬다. 우리는 소원에 대해 얼마나 깊게 생각해 봤을까?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거나, 교회나 성당이나 사원에 가서 소원을 빌거나, 떨어지는 별똥별에 소원을 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원’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위시>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소원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제공한다.

<위시> OST "This Wish" - 영상을 먼저 보고 글을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
https://youtu.be/aCofb-qQxKc?si=u9OGB5Snemi0Ltvw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놉시스


주인공 ‘아샤’가 사는 왕국 ‘로사스’는 국민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왕 ‘메그니피코’가 다스리고 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서 이루어주는 건 아니다. 국민들이 처음 로사스 왕국에 올 때 메그니피코 왕에게 소원을 건네주면, 왕은 소원을 안전하게 보관하다가 ‘소원 성취식’ 때 특별히  명을 선발해 소원을 이루어준다. (1년에 14명쯤.) 영화는 아샤의 할아버지의 100번째 생일이자 소원 성취식이 거행되는 날부터 시작한다.


소원을 잃어버린 사람들


메그니피코 왕에게 소원을 건네주면, 소원의 주인은 자신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망각하게 된다.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벙찐 표정으로 서있다가 백성들의 함성 소리에 이내 정신을 차린다.


이런 배경 설정이 독특하면서도 섬뜩하게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엔 왕에게 소원을 들어달라고 자신의 소원을 위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빼앗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소원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원의 의미


소원은 삶의 원동력이자 목적이다. 소원을 잃은 사람들은 이전과 달리 생기를 잃고 지루한("boring") 사람이 된다. 항해를 꿈꾸는 사람은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비행을 꿈꾸는 사람은 새들과 분수대에 앉아 있다.


문득 우리 사회의 모습이 떠올랐다. 치열한 입시에 치여서, 취준에 치여서, 먹고 사느라 바빠서, 내 소원을 잃어버리진 않았을까?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소원은 어딘가에 맡겨버린 채, 언젠가 내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는 막연한 공상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사회에, 타인의 시선에, 현실에 내 소원을 빼앗긴 건 아닐까?


소원과 시작
“시작할 생각에 설레!”

영화가 끝나며 소원을 되찾은 사람들은 “시작할 생각에 설레!”라고 외친다. 실로, 소원은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선택과 의식의 방향은 소원을 향한다. 따라서 메그니피코가 가져간 건 단순히 소원만이 아니었다. 소원을 이룰 시간 시작할 용기도 함께 가져간 것이다.


책을 쓰는 소원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늘 문장 한 줄을 쓸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오늘의 문장과 내일의 문장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시작을 빼앗겼다는 건 전부를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다. 아샤의 할아버지도 마음속에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면 무려 100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며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진작에 꿈을 향해 한 발자국 걸어갔을 것이다.


소원의 크기


왕의 견습생 면접에서 메그니피코를 만난 아샤는 진실을 알게 된다. 메그니피코는 오직 로사스 왕국에 이로운 소원만 선별해서 이루어주고, 나머지 소원들은 평생 이루어지지 못 한 채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이때 메그니피코는 자신이 이루어 줄 수 없는 소원에 ‘위험한’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떤 소원들은 자신의 왕위를, 혹은 로사스 왕국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개인의 소원이 얼마나 강하고 원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전에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봤다. 별똥별에 소원을 빌어 이루어지는 사람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별똥별이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에도 자신의 소원을 말할 만큼 늘 마음속에 그 소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그런 사람의 꿈은 별똥별이 아니더라도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의 힘은 이렇게 크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을 가지는 소원은 남에게 뺏길 만한 작고 사소한 물건 따위가 아니다.


소원의 운명


소원 주인이 소원을 넘겨주지 않고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메그니피코는 이러한 일말의 가능성조차 허용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그저 내 소원을 누군가 이뤄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홀려 순순히 소원을 내어주고, 소원 성취식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애초에 자신의 힘으로 소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라 로사스에 온 거야.”

메그니피코는 아샤에게 로사스 백성들에 대해 “그들은 애초에 자신의 힘으로 소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라 로사스에 온 것”이라고 말한다. 로사스의 백성들처럼 타인에게 기대어 내 소원을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사람은 소원을 뺏기기도 쉽고, 할 수 있는 거라곤 마냥 기다리는 것뿐이다. 소원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 소원의 운명도 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자격은 내가 정해.”

아샤는 메그니피코에게 “당신은 어떤 소원을 이루어줄지 말지 판단할 자격이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메그니피코는 “그 자격은 내가 정해.”라고 답한다. 정말일까?


소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건 그 소원이 이루어질지 말지 결정할 자격을 넘기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내 소원을 진정으로 이루고 싶다면, 내 소원을 꼭 붙들고 내 소원에 대한 자격을 지켜내야 한다.


소원은 내 전부


아샤의 친구 중 사이먼이 아샤를 밀고한다. 사이먼은 18살이 넘어 이미 메그니피코에게 소원을 주었는데, 아샤의 비밀을 숨겨주다가 자신의 소원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서였다.


사이먼은 나중에 아샤에게 사과하면서 “내 전부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라고 말한다. 밀고는 치사했지만, 소원을 잃으면 내 전부를 잃는다는 생각과 그만큼 소원이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소원에 대한 사이먼의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소원 구슬이 깨졌을 때 소원 주인은 가슴을 움켜쥐며 슬픔을 느낀다. 영화에서는 ‘grieve’라는 표현을 쓰는데, 한국말로 ‘비통하다’라는 뜻이다. 소원을 잃은 사람은 비통함과 상실감을 느낀다. 만약 우리가 소원을 잃었는데도 아무렇지 않고 무감각하다면 사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시>가 디즈니의 클리셰를 버무린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클래식’이라 표현하고 싶다. 중요한 건 영화의 플롯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Once upon a time으로 시작해서 happily ever after로 끝나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이지만, 아이들을 위한 동화 속에서도 어른들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는 동식물과 노래로 하나 되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표현되지 않은 숨은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면 이 영화에서도 우리 삶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위시>가 있음으로써 우리는 아이들에게 “<위시>에서 백성들이 메그니피코한테 소원을 주고 결국 아샤가 다시 되찾아주잖아? 우리도 소원을 다른 사람에게 뺏겨서는 안 돼. 꼭 갖고 있어야 돼.”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신발끈이 풀리고 나서야 신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처럼, <위시>는 우리가 소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소원을 잃은 건 아닌지, 간절히 원하는 소원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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