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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 May 01. 2024

초보 식(植)집사의 하루

1년 전 이맘쯤, 학과 후배가 일하는 인사동 공방에서 테라리움을 만들었다. 테라리움은 작은 유리 어항 안에 식물과 이끼를 넣어 키우는 데, 크기는 작지만 하나의 자연 세계 같은 느낌을 준다.

내 테라리움


혼자 힘으로 처음 키우는 식물이기도 하고 직접 흙부터 깔아서 그런지 애정을 갖고 물도 꼬박꼬박 챙겨주고 돌보았다. 나의 첫 반려식물. 처음엔 잘 몰랐는데 어느 순간 보니 키가 훌쩍 커진 게 눈으로 보였다. 물만 줬는데도 이렇게 잘 자라다니 신기했다.


그런데 얼마 전 평소 주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물을 주는 바람에 잔디가 하얗게 일어나 버렸다. 이끼는 죽어버렸지만 아직 살아있는 식물을 구해야 했다.


흙과 이끼를 바꿔주기 위해 쉬는 날인 월요일을 반납했다. 빨간 버스를 타고 장장 1시간을 달려 종로 2가에 내렸다. 좋아하는 샌드위치 프랜차이즈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인사동으로 향했다. 인사동은 데이트로 짝꿍이랑 같이 온 적은 있지만 혼자 오는 건 처음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와의 데이트가 되어버렸다.


겨우 두 명이 지나갈 수 있을 만한 좁은 골목길을 걷는데 해가 반팔 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을 따스하게 쬤다. 그렇다고 덥지도 않고 딱 좋은 온도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찍은 골목. 그새 그늘이 졌다.


쌈짓길로 향하는 익숙한 돌길을 걷는데 2층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한옥 카페 창문으로 여유롭게 커피 마시는 사람이 보였다. 카페가 완전 내 스타일이네, 시간이 난다면 저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2층 한옥 카페. 내가 찜한 자리.


공방에 들어가 테라리움을 맡기고 1시간 뒤에 돌아오기로 했다. 1시간의 자유시간이 생기다니! 쌈짓길을 나와 아까 봐두었던 카페로 들어갔다. 내가 봤던 딱 그 창가 자리가 비어있었다. 나이스. 빠르게 짐을 두고 커피를 주문했다.


넓게 난 통창에는 솔솔 바람이 불었다. 주변 빌딩들 때문에 그늘져 덥지도 않고 딱 좋았다. 돌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자리라 한동안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바라봤다. 백발의 외국인 부부, 젊은 커플,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 가게 앞 옷을 구경하는 사람들, 가게에 노란색 꽃이 담긴 화분을 다는 주인.. 평온하고 다채로웠다.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


가져온 책을 읽다가 주변 사진을 찍고, 커피를 홀짝이고, 글을 끄적이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고.. 일상에 이런 순간들이 자주 녹아든다면 삶이 더 풍부하고 짙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공방으로 돌아가 산뜻해진 내 테라리움을 받았다. 이끼가 생기 있게 초록초록하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내 식물이 새 옷을 입은 듯한 느낌. 이게 바로 식(植)집사의 마음인가 싶었다.

공방지기님의 손길로 새 생명 얻는 중


혼자라 외로우면서도 고요하고 여유로웠던 하루. 혼자 노는 법을 잊은 나에게 주는 시간이자 평범한 일상 속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을 순간이었다.


만족스러운 나와의 데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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