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수유리를 생각해
바람과 하늘에 스민 추억
얼마 전 추석을 맞아 외가가 있는 수유리에 다녀왔다. 수유리는 내 기억이 살아있는 때부터 9살 때까지 산 곳이다. 안 가본 곳이 없을 만큼 동네 곳곳을 활발히 누벼서 오랜만에 가도 모든 길이 기억난다. 키가 훌쩍 커버려 길이 기억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 건 신기하다.
요즘처럼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날씨에는 수유리에서의 추억을 유난히 많이 곱씹는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반팔 사이로 슝슝 들어오던 바람,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이던 높은 나무들, 한적한 주택가. 집 앞 시멘트 길 위에 우두커니 서서 조용히 눈을 감고 바람과 새소리를 듣던 어린 시절의 감각이 선명하다.
선선한 가을 저녁, 짙은 남색 하늘 아래 식사를 마친 우리 가족은 동생이 탄 유모차를 끌고 집 근처 산 입구로 산책을 가곤 했다.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걸으면 북한산 둘레길 입구에 도착하는데 엄마와 아빠는 그곳에 있는 자판기에서 믹스 커피를 뽑아 마셨다. 나는 호기심에 엄마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두 모금 홀짝 뺏어 마셨다. 살짝 녹이 쓴 노란색 시소에 앉아 엄마 아빠랑 참 재밌게도 놀았다.
왼쪽에는 아빠 손, 오른쪽에는 엄마 손을 쥐고 뒤로 세 발자국 갔다가 앞으로 와다다 뛰어 하늘을 붕 나는 놀이도 많이 했다. 특히 4.19 국립공원에 놀러 갔을 때 회색 돌바닥 위에서 자주 그랬다.
수유리에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추억이 스며들어 있다.
함께 장난치고 놀았던 젊은 시절 부모님의 모습,
학교에서 사귄 첫 단짝친구와 하굣길,
최애 파란색 팬돌이와 김밥을 싸간 가을 소풍,
사촌과 함께 보고 따라 했던 투니버스 만화들,
바람과 하늘과 나무들.
수유리에서 보낸 가을보다 다른 곳에서 보낸 가을이 더 많지만 기억에 남는 건 수유리에서의 가을이다. 오늘 같은 맑은 가을날에는 수유리가 더 생각난다.
그리운 시절, 그리운 사람, 그리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