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로는 종이비행기를 못 접는다

<일상 24컷>

by 다오


종이에 필기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글씨가 안 이쁘네요..ㅎ


언제부터인가 종이에 글을 쓸 때면, 정해진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을 뱉고 있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말인데 왜인지 오늘은 한 번 더 곱씹게 된다.

갑자기 종이가 그리워져서 프린터기 용지함을 열고 몇 장 꺼내왔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말 그대로 A4 용지에서 나는 익숙한 종이냄새에 기분 좋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컴퓨터 관련 일을 하기에 더더욱 종이에 필기할 일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 몇 년간 텍스트로 정보를 정리할 때 대부분 Notion 같은 업무 보조툴을 이용했고, 심지어 필기나 낙서도 주로 아이패드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종이가 끌린 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 종이로 읽어야 할 논문을 프린트해서 보게 되었다. 항상 아이패드로 읽다가 종이에 출력해 읽으니 기분이 묘하다.

필요한 곳에 밑줄을 치다가 선을 잘못 그었는데 되돌릴 수 없다.

검은 펜 하나밖에 없어서 다양한 색상으로 표시도 못한다.

무엇보다 글씨의 확대 축소가 안된다… 이건 좀 많이 불편하다.


생각해 보면 이런 불편함 때문에 아이패드를 쓰는 것이지만 오랜만이라 다 용서된다.

오히려 익숙하던 종이가 색다르게 느껴져서 불편해도 재밌다.

일상에 새로운 자극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꼭 비싸고 좋은 물건일 필요는 없나 보다.

가끔씩은 종이를 사용해야지 다짐하며 구석에서 서운해할 아이패드를 킨다.


아이패드를 처음 구입한 날을 생각해 보면, 배송오기 며칠 전부터 설렘에 정말 종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익숙하고 불편한 종이에서 드디어 벗어나 첨단을 달리는 라이프스타일을 꿈꾸며 배경화면을 꾸미던 게 생각난다. 120HZ의 주사율로 끊김 없이 부드러운 화면을 볼 때마다 역시 프로로 비싼 돈을 주고 산 게 아깝지가 않다.


하지만 오랜만에 종이를 써서 그런지 약간은 종이에 아쉬움이 생긴다. 종이와 함께한 지난 20년의 추억은 그리 아름답지 않지만 정들었나 보다. 디지털 기기로 종이의 역할이 대체되는 것이 오늘따라 마냥 반갑지가 않다. 직업이 개발자인데 아날로그를 추구하다니.. 참 모순적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종이가 만약 아이패드보다 희소하고, 새로 개발된 비싼 사치재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종이가 아이패드보다 멋지다고 느낄까?


사실 종이는 인류사를 놓고 보면 아이패드보다 위대하다. 종이는 인류사에 결정적 전환점을 가져온 엄청난 발명품이었다. 기원전 105년경 한나라 황실의 내시 채륜에 의해 최초의 종이가 발명된 후 무려 2000년간 종이는 지식과 문화를 보존하는 수단으로써 문명 발전의 핵심이었고, 기록을 통해 사유의 범위와 배경을 넓혔다. 종이의 대량생산과 인쇄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르네상스 시대 이전 중세 유럽에서는 종이 책 한 권이 집 한 채 가격이었던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으며 귀족들과 성직자들만이 도서관 출입과 종이책을 소유할 수 있었던 권력의 상징이었다. 역사를 놓고 보면 아이패드보다 멋지다고 느낄만하다.


이외에도 종이의 매력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실물로 존재하는 것의 매력

만질 수 있고 구길 수 있고 냄새를 느낄 수 있는 등의 매력은 아이패드로는 느낄 수 없다. 스마트기기 하나는 많은 도구를 대체하고 편리성을 제공하지만 편리성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필체를 가진다는 것의 매력

손끝에 묻어나는 잉크, 글씨의 흐름, 손으로 쓴 글자 하나하나는 나만의 흔적이다. 마치 지문처럼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필체는 엄청난 매력이다. 많이 발전했지만 그래도 아이패드의 필체는 아직까지 종이의 필체를 따라올 수 없다고 본다.


아이패드로는 종이비행기를 접을 수 없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사촌동생의 말이다. 귀여우면서도 빵 터지는 답변이다. 나름 철학적인 의미도 있는 것 같다. 기술발전에 따라 우리 삶에 쓰는 물건 하나하나가 너무 어른의 시선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어려운 아이패드보다 가지고 놀 수 있는 종이비행기가 더 멋진 장난감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아이패드, 스마트폰, 디지털 기기들이 점점 더 많은 역할을 대신하고 있어 점점 종이 쓸 일이 없다.

어쩌면 종이의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스마트 기기가 종이를 완벽히 대체할 수도 있기에 지금 열심히 누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가끔은 종이를 사용해야겠다.




배경 이미지는 OpenAI의 DALL-E를 통해 생성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세탁기는 양말을 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