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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꽃쌤 Nov 26. 2018

동산동 풍경화3

새로운 풍경화 - 언제쯤 여기가 편해질까?

어린 시절,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요즘, 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교사의 체로 세상을 거르며, 교사의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는 나를 보며 스스로 놀란다.


사우나의 탈의실에서 머리를 말리며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을 잠깐 본 적이 있다. 고등학생인 꽤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역시 고등학생인 꽤 예쁜 여자 주인공을 벽에 밀치고 두 손과 몸으로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내가 널 좋아하니 너도 나를 좋아해야 해.’ 식의 일방적인 고백을 하는 장면이었다. 텔레비전, 특히나 그런 류의 달달한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 장면은 실로 오랜만에 보았다. 보자마자 든 생각은

‘저거 학교폭력인데.’

였다. 그리고는 혼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 그런 드라마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무렵인 10대 후반에는

‘어머, 멋져! 낭만적이야.’

하며 부푼 설렘과 환상을 품었을 거란 걸, 아니 실제로 품었다는 걸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임을 뻔히 알면서도 사복 차림인 두 남녀의 숨막히는 로맨스에 주변의 여고생들은 물론 아줌마들까지 녹아 쓰러졌지만 나는 작은 충격에 혼자 심각해졌다.

‘이거 완전 교사 사람이네.’    


요즘 내 삶의 큰 사건을 겪으며 나는 내가 얼마나 ‘교사스러운 인간’인지 한번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3년 전부터 독립을 생각해온 나는 두 달 전, 집을 ‘질러버렸다.’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나름의 구입 기준이 명확히 있긴 했지만 너무도 빠르게 구입을 결정하고, 계약을 하고, 대출을 받은 후, 이사를 했기에 이건 정말 ‘질렀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나는 8월26일에 집을 보러갔고, 10월7일에 이사를 했다.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인사이동으로 근무지를 옮겼던 건 3월이었으며, 충분히 통근할 만 했는데 그냥 그렇게 급히 독립을 했다. 하고 싶었고, 해야할 것 같아서 그리 했다.


오랫동안 꿈꿔오고 다짐했던 독립이었지만 계약에서 이사까지 정확히 6주 동안 나는 엄청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다.




첫 번째 이유는 경제적 압박감이었다. 내 명의의, 1억 이상의 빚이 생긴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였다. 분명 수도 없이 계산기를 두드려보며, 현재에도 미래에도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금액이고 월급이라고 내 자신을 다독였지만 그 불안과 두려움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행여나 내 계산이 틀렸을까봐, 혹시라도 돌발 변수가 있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까봐 밤잠을 설쳐가며 두려워했다.


20대 때 몇 년 간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적이 있다. 그 때 나 역시 몇 년간 임용고사에 계속 떨어졌기에 고정 수입이 없었다. 거의 10여년 만에 그 시절의 고통스러운 경제적 압박이 느껴졌다. 탈출구가 없는 깊고 좁은 우물에 갇힌 기분이었다. 결혼해 대출 받아 집을 사고, 그 대출금을 갚으며 아이를 낳아 기르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와 여자들이 새삼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졌다.


이 불안은 현재 아버지의 주식빚을 대신 갚고 있는 친구가 논리적인 설명으로 덜어주었다. 처음 겪는 변화라 그렇지, 막상 대출금 상환이 시작되면 금방 적응할 거라고. 너는 원래도 돈을 많이 쓰는 성향이 아니니 쓸 돈이 조금 줄어도 금방 그에 맞춰 잘 살 거라고. 20대 때와 지금은 엄연히 다른 처지이니 큰병에 걸려 쓰러져 월급을 못 받지 않는 한 네가 우려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씩씩하게 나를 다독여줬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집값으로 빚이 있고 너는 뒤늦게 그 대열에 동참했을 뿐이라는 친구의 말에, 나보다 더 큰 어려움 속에서도 담담하고 따뜻한 말투로 논리적인 사례와 근거를 들어 나를 위로하는 그녀의 따뜻한 단단함에 이 불안은 찬찬히 사그라들었지만 더 큰 불안은 따로 있었다. 바로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 늘 함께 지내온 엄마 곁을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전주시 덕진구 동산동을 3주 이상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어.”

내가 우스갯소리로 자주 했던 말이다. 농담이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내가 우리 집을 떠나 지낸 최장 기간은 해외로 20일 여행을 갔던 때이다. 한국 안이어도 나는 처음 방문하는 도시로 가면 갈수록, 하여 동산동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불안함을 느끼곤 했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남자친구와 1박2일로 떠난 여행지에서도 밤에 남자친구와 나란히 누워 눈을 감고는

‘엄마랑 내가 점점 멀어지고 있나? 몸도 멀리 떠나왔고 마음도 멀어지고 있나?’

하며 엄마 생각을 했더랬다.


아무 말 없이 각자 자신의 공간을 하나씩 차지하고는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며 서로 관여하지 않는 우리 가족의 특성상, 내가 나가 살아도 서로에게 큰 심적 타격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나가 살려고 보니 아무런 소리는 없지만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 은근한 의지와 안식을 주고 있었다. 나 혼자 있을 때의 적막한 고요와 쓸쓸함이 헛헛한 외로움이 아니라, 잠시 후 등장할 부모님이 오시기 전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쉼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 고요와 쓸쓸함에 내가 잠식 당하지는 않을까, 지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자다 깬 새벽, 역시 중간에 깨 뒤척이는 부모님이 내는 온갖 소리를 들으며 ‘지금, 여기, 같이 있음’을 느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함께 있는 게 너무도 불편하고 답답하여, 당장이라도 독립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 보려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또 ‘지금 이 감정’이 압도적이었다.    




오랫동안 고민한 나는 새 집에 천천히 옮겨 가기로 했다. 이사하자마자 바로 새 집에서 자지 않고, 동산동 집에서 자기로 했다. 새로 이사한 집은 3월에 새로 옮긴 학교 근처이니 퇴근 후 들러 청소를 하고 다시 동산동 집으로 왔다. 주말에도 낮에는 새 집에 가 청소를 했고, 밤에는 다시 동산동으로 돌아왔다. 과연 이걸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언제부터 새 집에서 혼자 잘 지낼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새롭게 느끼고 깨달아가는 것이 있었다.


청소를 하면서 나는 새로운 공간에 익숙해지고 정이 들기 시작했다. 입주하여 이런저런 문의로 관리 사무소나 경비실에 가 아파트 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그 분들의 친절함에 감동을 받았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주민들은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다정하게 먼저 인사를 해주었고, 나는 따라서 인사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안정되었고, 어두워졌던 인상이 밝아졌으며,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졌다.  


나는 내가 우리반 아이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 처음 1학년 담임을 맡은 나는 3월에 ‘입학초기 적응기간’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입학초기 적응기간’이란, 아이들이 낯선 학교에 적응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학교 재량껏 1~3주간 4교시까지만 수업을 받고 하교하는 것이다.

‘학교에 적응하려면 더 오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오전에 잠깐 왔다 가는데 언제 적응을 한다는 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교무를 맡으신 옆 반 선생님과 올해 학교를 옮긴 나는 3월에 너무 바빴기에 우리는 작년보다 2주 늘려 3주간의 적응 기간을 갖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이 선생님 무서워 학교 오기 싫다고 하거나, 수업 시간에 엄마 보고 싶다고 엉엉 울거나, 집에 가겠다고 징징 떼를 쓸까봐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특수교육 대상 학생 1명을 제외하고는 3월 한 달 간 특별한 문제 행동 없이 학교생활을 잘 해주었다. 어머님들의 걱정 어린 말씀도 전화나 방문 상담으로 많이 들었지만 적어도 내 겉보기엔 별 이상이 없었다.


태어나 처음 동네를 떠나보고 나서야, 엄마품을 떠나보고 나서야, 새 집을 오가며 청소 해보고 나서야 나는 우리반 아이들의 마음에 공감을 하였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차마 나에게 말은 못했겠지만, 아이들은 학교라는 곳과 교실이라는 공간, 그 안의 처음 보는 책상과 의자, 새로 만나는 선생님이 낯설고 두려웠을 것이다.

예쁘지도 않고 칙칙하기만 한 학교 건물, 알록달록은 커녕 아무런 꾸밈이 없는 교실, 높고 크고 딱딱한 책상과 의자, 어딘지 모르게 자기도 긴장해 있는 선생님. 아이들은 입학식 전날에도, 입학식 당일 아침에도, 아니 매일매일 학교 오는 길에도 계속 어색하고, 긴장되고,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언제쯤 여기가 편해질까?’

아이들이야 말로 학교 적응을 가장 원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간절히 원했던 건, 아마도 선생님이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기대 아니었을까? 나는 뒤늦게 3월에 아이들에게 해줘야 했던, 하지만 해주지 못했던, 말과 행동, 마음 씀을 깨달았다. 이런 어색과 긴장, 불안, 두려움을 몰라줬다니 너무도 미안하다. 허나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전학을 가본 적도 없었고, 태어나 3주 이상 동산동을 떠나서 살아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배우고 자라려고 독립을 했구나. 나는 아직도 어리고 부족한 사람이었던 거 맞구나.’

나는 내 자신을 토닥이며, 가는 바람결까지 들리는 믿기지 않는 정적에 나를 누이고 홀로 잠을 청한다. 친구들의 말이 맞았다. 눈 딱 감고 하룻밤만 자면 거짓말처럼 갑자기 원래 내 집처럼 느껴지는 거였다.

이제 새로운 동네 ‘금암동’에서 새로운 그림이 시작된다. 밑그림을 가늠하는 마음이 은근히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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