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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꽃쌤 Nov 26. 2018

동산동 풍경화2

동산동 풍경화 - 낮의 가장자리

2013년 모교로 발령받기 전, 2007년에서 2009년 사이에 모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한 적이 있다. 출·퇴근이 쉽고 가까워서 좋았고, 예전에 공부했던 교실에 다시 들어가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불편한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아이들의 사생활’을 의도치 않게 너무 자주 자연스럽게 접한다는 것이었다.


밤새 온 동네에 울려퍼지는 부부싸움 소리에 시달리다 퀭한 눈으로 출근을 하는 날엔 길에서부터 아이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누구일까?’

‘어젯밤 물건이 꽤 부서졌을텐데 어디 다치지는 않았을까?’

‘화 난 아빠에게 맞지는 않았을까?’

‘옆에서 말리다가 되레 봉변 당하지는 않았을까?’

‘무서워서 어디 잠은 제대로 잤을까?’

‘부모님이 왜 싸우는지 이유를 몰라 답답하거나, 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겠지.’


더 마음이 쓰린 건 그런 아픈 속을 드러내지 못하고, 애써 지난 밤을 숨기며 태연한 척, 밝은 척 수많은 학생들 속에 가만히 앉아있을 그 아이의 축축한 영혼이었다. 분명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도 모르고, 설령 어렵게 드러내어 표현했다 할지라도 적절히 위로해주고 따뜻하게 다독여 줄 사람이 그 아이 주변에 없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확신도 있었다.

2013년 모교로 발령을 받은 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렇게 나의 낮은 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나의 방은 한쪽 벽 전체가 다 큰 창이다. 그 창은 길가로 나있어 3층인 나의 방엔 늘 블라인드가 쳐있다. 집 안이 보일까 걱정되어 늘 블라인드를 치고 살았다. 결국 통창인 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 창 덕에 나는 방에 누워서 ‘길거리 가정 방문’을 할 수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블라인드 사이를 벌리고 힐끗 밖을 내다보면 누가, 누구랑, 몇 시에,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 다 알 수 있었다. 가끔 성별과 학년을 초월하는 뜻밖의 교우관계나 지연을 목격하여 아이들을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거나 생활지도가 한결 쉬워졌던 적도 많았다. 주말에는 우리 반 여자 아이가 예쁘게 차려입고는 언니,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타러 나가는 걸 보고 일기 검사할 때만 ‘읽었던’ 그 가족의 주말 나들이와 화목함을 직접 느끼기도 했다. 일기에선 볼 수 없던 내용도 있었다. 나는 종종 화난 아빠나 엄마에게 붙잡히듯 끌려가는 아이도 보았고, 늦은 밤 형제들과 삼각 김밥을 먹으며 밤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도 보았다. 반대로 이른 아침,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으며 등교하는 아이도 보았다. 가끔은 이런 의도치 않은 가정 방문과 그 덕에 풍부해진 아이들에 대한 정보에 되레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도 했다.


마주치는 건 학생뿐만이 아니었다. 학부모들도 시시때때로 마주쳤다. 서로 알아보든, 둘 중 한명만 알아보든, 어쨌든 누구라도 다른 한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업무적으로든, 학급 담임으로서든 서로 인연이나 관련이 있는 사이라는 거다. 5년을 근무하다보니 이런 인연과 사이가 매우 많아졌다.


아이의 문제 행동에 대해 상담을 할 때 선생님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화를 내고는 동네 음식점에서 마주치자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밥을 먹었던 엄마. 몇 년 째 다니던 동네 이비인후과의, 역시 몇 년째 형식적이고 사무적인 대화만 주고 받던 간호사님이었는데 어느 날 날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박명화 선생님 접수 해드릴게요. 83년생.”

라고 말하고선 스스로 깜짝 놀랐던 엄마. 병원 일손이 달릴 땐 이 분께 엉덩이를 까고 주사를 맞았던 적도 많았음을 굳이 숨기지 않겠다. 학교 카드로 빵집에서 과학 실험 준비물을 샀는데 선생님 공지 문자 너무 많이 받아 핸드폰 번호를 다 외웠다며 요청하지 않아도 포인트 적립을 자동으로 해줘 행정실과 서로 얼굴 붉히게 만들었던 엄마. 대체 밤마다 어디를 그렇게 가는지 한껏 꾸미고 화장품과 향수 냄새를 풍기며 택시를 타고 동네를 떠나는 엄마. 내가 맥주나 컵라면, 초특가 할인 우유를 들고 마트 계산대에 서면 씨익 웃으며

“선생님 아직 식사 안 하셨어요?”

하고 물었던 나와 동갑내기 엄마까지.


한 아이의 엄마를 알고, 아빠를 알고, 그분들의 직업을 안다는 것. 부모님의 얼굴, 말투, 행동,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안다는 것은 그 아이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다양하고도 믿음직한 주파수가 되었다.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학부모님들은 아이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고, 아이들은 부모님의 어딘가에 단 한구석이라도 꼭 닿아 있었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동창이 학부모가 되어 내 삶에 재등장하기도 했다. 3학년 담임을 했을 때, 그 반에는 나의 초등학교 3학년 남자 동창의 아들이 있었다. 아빠가 나에게 했던 장난과 똑같은 장난을 같은 반 친구들에게 하는 그 녀석을 보며

‘지금이라도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인가?’

하며 혼자 낄낄낄 웃기도 했다. 남자 동창은 차라리 다행이다.


교육과정 설명회 때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며 반말로 인사를 하길래 의아해 뒤돌아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 여자동창이 있었다. 그 친구와 인사를 한 이후로, 점심시간에 급식실에만 들어가면 밥을 먹던 1학년 여학생이 나에게 달려와 안기며

“우리 엄마 친구야.”

라고 주변 친구들에게 나를 자랑했다. 더 놀라운 건 그 여학생과 인사하는 우리반 남학생. 어떤 사이냐고 물으니 외사촌이고, 거의 매일 만날 정도로 가깝게 산다고 했다. 한동안 나는 교실에 CCTV가 있고,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찰된 후, 회자되고 있는 듯 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내가 즐겨가던 꽃집의 사장님이 우리반 남학생의 이모이기도 했고, 수업 나눔 때 오신 할머니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나의 할아버지와 아빠의 성함을 맞추시기도 했다. 알고 보니 할머니도 젊은 시절부터 동산동에 사셨고, 그래서 나의 할아버지를 아시는 거였다. 할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동산동에 터를 잡아 사셨다. 지금도 살아 계시고, 살고 계신다. 그 할머니의 딸, 즉 우리 반 여학생의 이모는 또 아빠의 제자였다. 아빠도 전주의 한 사립여고에서 평생 교직 생활을 하셨고, 지금까지도 고집같은 소신으로 동산동에 살고 계신다. 아빠의 소신은 ‘그냥 귀찮아서’ 이다.


학부모님들이 갖고 있는 나에 대한 배경 지식과 맥락이 나의 교육활동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지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데 미약하나마 힘이 될 수 있을까? 자신 없어지고, 두렵기도 하지만, 부디 그렇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의 아빠와 작은 아빠들, 사촌들을 포함한 친가의 형제와 자매들은 모두 다 최소 1년이라도 전주조촌초등학교에 적을 둔 적이 있다. 나와 내 친동생들은 이 학교를 전학 없이 6년간 다니다 졸업을 하였다. 어느 날엔 건물 밖까지 나와 아이들 하교지도하며 배웅하다

“어렸을 때 우리 비디오 가게 와서 만화 영화 빌려가던 꼬마가 여기 선생님이 되었네요.”

라는 처음 보는 할머니의 인사를 듣기도 했다. 어른들은 어찌 이리 눈이 좋으시고, 기억력이 좋으신지……. 아니면 내 얼굴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늙어버렸거나, 세월의 흐름을 비웃는 동안인건가…….


하지만 나도 기억하고 있다. 어렸을 때 엄마에게 떼를 써 100원씩, 200원씩 받아내어 사 먹었던 호떡집의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조촌초 후문의 <신나라 슈즈 뱅크> 앞에 다시 가게를 열었다. 거의 30여 년만에 보았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알았다.

‘할머니 지금도 호떡 파시는구나…….’

한 번씩 일부러 팔아드리고 싶기도 했지만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너무 많았고, 포장해 사온다 해도 동생들도 다 떠난 집에 그걸 먹을 사람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여지껏 한번도 못 사드렸다.  


동산동과 나는 보이지 않는 어떤 실로 복잡하게 엉켜있는 실타래 같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점점 동네에서 술집, 커피숍, 미용실, 헬스클럽, 사우나에 가지 않게 되었다. 집 앞으로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옷은 잠옷 차림으로 나가도 마스크와 모자는 꼭 쓰고 나갔다. 어느 날씨 좋은 날 저녁, 동네 친구와 학교 운동장에서 맥주 한 캔씩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때가 무척이나 그립다. 평생을 살아온 동네에서, 게다가 모교에서 직장 생활을 하니 이런 불편한 점들이 많았지만 좋은 점도 없진 않았다.


학군에 ‘오랜 시간’ ‘살아오고 있음’은 내가 낮을 샅샅이 훑을 수 있게 해주었다. 낮의 가장자리에서 수집된 이런 정보들은 한낮의 정점인 나의 직장, 전주조촌초에서 나의 교육 서비스 대상자인 학생들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공감한 후 해석하는데 다양하고 풍부한 맥락을 제공해 주었다. 풍부한 배경 지식을 갖고 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러한 정보들이 편견이나 선입견이 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이 정보와 맥락들이 아이들을 지도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음은 솔직히 부인할 수 없다.


반대의 경우도 좋았기를 바란다. 같은 동네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오고 있는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잘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학부모님들의 마음과 기대를 내가 져버리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침 봉사 활동을 하다 정문 옆 개교 90주년 기념비에 가서 한 이름을 가리키며

“여기 이 사람 선생님 아빠야.”

라 말할 수 있고, 하단에 ‘조촌국민학교 졸업 여행’이라고 써있는 낡은 흑백의 단체 사진을 보여주며 한사람을 콕 찍어 ‘이 사람도 선생님의 아빠’라 말할 수 있으며, 선생님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오래전 학교 건물과 예전 운동장을 설명해주는 사회 수업을 후배들과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있다.


이제는 액자에 넣어두고 한번씩 찾아보는 참 예쁜 그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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