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잃어버린 정체성의 고백 �️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이 가장 혼란스럽습니다. 하루의 첫 의식이 시작되기 전, 그 짧은 순간 나는 여전히 '부장'이고, '팀 리더'이며, '회사의 중요한 구성원'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깨어나는 순간, 현실이 밀려옵니다. 더 이상 그런 타이틀은 없습니다. 30년 동안 매일 아침 울리던 알람도, 바쁘게 챙기던 출근 준비도, 통근 전철에서 스쳐 지나가던 익숙한 얼굴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서랍을 열어보면 여전히 그곳에 있는 내 명함. 이제는 단지 종이 조각에 불과합니다. 어제까지 나를 정의하던 모든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효가 되었습니다. "○○기업 마케팅 부장 김△△"라는 글자가 마치 다른 사람의 이름처럼 느껴집니다.
휴대폰은 더 이상 울리지 않습니다. 한때는 쉴 새 없이 울리던 전화, 끊임없이 알림이 울리던 이메일과 메시지. 그 모든 소통의 끈이 하루아침에 끊겨버렸습니다. 가끔 오는 전화는 대부분 보험이나 재테크 상품을 판매하려는 영업 전화뿐입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회의를 주재하고, 후배들의 멘토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몇 달 전만 해도 나는 나를 직함으로 소개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기업 마케팅 부장 김△△입니다." 이제 누군가 내게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저는... 퇴직자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방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갑자기 내 가치가 떨어진 것처럼.
퇴직 전, 내 하루는 분 단위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7시 기상, 8시 30분 출근, 9시 아침 회의, 12시 점심... 빡빡한 일정이 때로는 숨막히게 느껴졌지만, 그 리듬은 내 존재에 구조와 목적을 부여했습니다. 이제 그 모든 구조가 사라졌습니다.
"오늘은 뭘 해야 하지?" 매일 아침 던지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이 없습니다. 때로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유가 오히려 무거운 짐처럼 느껴집니다. 갑자기 내 앞에 펼쳐진 무한한 시간이, 역설적이게도 압박감을 줍니다.
회사 생활은 분명한 피드백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성과에 대한 평가, 월급, 승진, 동료들의 인정... 이런 외부적 확인이 내 가치를 증명해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퇴직 후에는 그런 확인 장치가 사라집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내가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인가?"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취미를 찾아보려 했습니다. 등산, 골프, 그림 그리기... 회사 다닐 때는 "시간만 있으면 이것저것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시간이 생기니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도 '성과'나 '인정'과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취미를 통해 뭘 이룰 수 있을까?", "남들보다 잘할 수 있을까?" 회사 생활에서 길들여진 사고방식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저녁 식사 후, 아내가 "오늘 뭐 했어?"라고 물을 때마다 대답하기가 민망합니다. "신문 읽고, TV 보고, 잠깐 산책했어..." 이런 대답을 하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직장 생활 때는 늘 바빠서 가족과 시간을 못 보낸다고 미안해했는데, 이제 그들과 함께할 시간이 많아졌지만 왠지 모르게 위축됩니다. 마치 내가 더 이상 가장으로서의 권위나 존재감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최근에 옛 직장 동료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는 여전히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대화 중에 회사 상황을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팀이 많이 바뀌었어요. 사실... 부장님이 떠나고 나서 몇 개월 지났는데, 회사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더라고요."
그 말이 처음에는 가슴을 찔렀습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는 냉정한 현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오히려 해방감을 주는 진실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 정체성이 직함이나 회사와 완전히 동일시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어제 저녁, 오랜만에 일기를 썼습니다. 직장 생활 때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입니다. 그냥 그날 느낀 것들, 생각한 것들을 솔직하게 적었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이런 문장이 나왔습니다: "나는 내 직업이 아니다. 나는 내 직함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나다."
이 단순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퇴직 후 가장 어려운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30년간 나를 정의하던 외부적 요소들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나'를 마주하는 것. 그것은 두렵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퇴직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실제로 그 과정을 겪어보니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애도 과정과 비슷합니다. 잃어버린 정체성을 슬퍼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때로는 분노하다가, 결국에는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여정입니다.
오늘 아침, 명함을 정리했습니다. 오래된 명함들을 보관용으로 몇 장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명함을 상상해봤습니다. 직함이나 회사 이름은 없고, 그저 내 이름만 있는 명함.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나'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분명 두렵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회사의 기대나 사회적 성공이라는 잣대에 맞춰살 필요 없이, 온전히 내 가치관과 열정을 따라갈 수 있는 자유. 그 자유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괜찮습니다.
퇴직 후의 삶은 빈 캔버스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 공백이 두렵고 압도적이지만, 조금씩 내 색으로 채워나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직장 생활에서는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여전히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이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혼란을 피하지 않고 마주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과정의 일부임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는 오늘 존재하지 않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와는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무언가를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아프지만, 필요한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