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줌마" 라고

"과장님"에서 "아줌마"로: 호칭 하나에 담긴 존재의 무게 �️


갑자기 달라진 세상의 부르는 소리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줌마, 여기 주문이요!" 저를 향한 목소리에 순간 멈칫했습니다. 누굴 부르는 걸까? 하고 뒤돌아봤지만, 그 호칭의 대상은 분명 저였습니다. 불과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에서 늘 "과장님", "팀장님"이라 불리던 제가 이제는 카페에서, 마트에서, 식당에서 그저 '아줌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30년 직장 생활을 마치고 명예퇴직을 선택한 지 100일째. 회사에서는 그토록 기다리던 '자유'였지만, 막상 사회로 나오니 예상치 못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여기 아줌마, 이거 얼마예요?" "저기 아줌마, 이쪽으로 좀 비켜주시겠어요?"


대형마트에서 쇼핑하다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에게 들은 말이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회의실에서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후배들에게 조언을 건네며, 존중받던 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저를 그저 '아줌마'라는 익명의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바라봅니다. 언제부터 내가 '아줌마'가 되었을까? 얼굴의 주름이 더 깊어진 걸까? 아니면 퇴직 후의 여유로움이 '직업 없는 아줌마'의 모습으로 보이는 걸까? 그도 아니면, 사실 나는 항상 '아줌마'였지만 직함이 그 사실을 가려주고 있었던 걸까?


호칭 하나에 담긴 보이지 않는 계급


"아줌마"라는 호칭이 주는 불편함은 단순히 나이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소멸, 정체성의 박탈과도 같았습니다. "과장님", "선생님", "사모님" 같은 호칭들은 적어도 상대의 사회적 위치나 역할을 인정해주는 말들입니다. 하지만 "아줌마"는 어떤 특별한 역할도, 정체성도 부여하지 않는 그저 나이 든 여성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에 불과합니다.


회사에서는 명함 한 장으로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명함 속 직함은 저를 보호해주는 방패였고,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틀이었습니다. 퇴직과 함께 그 방패를 내려놓으니,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갑고 무례했습니다.


친구들과의 점심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직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은 제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그냥 나이 든 여자를 부르는 말이잖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마" 같은 반응들이었죠. 하지만 이미 퇴직한 다른 친구는 깊이 공감했습니다.


"맞아, 나도 그랬어. 처음에는 식당에서 '아줌마' 소리에 돌아보지도 않았어. 나를 부르는 줄 몰랐으니까."


우리는 한참을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씁쓸함이 묻어있었습니다. 사회가 정의하는 여성의 가치가 나이와 함께 어떻게 변해가는지, 직함이 사라진 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다르게 대하는지에 대한 공통된 경험이었으니까요.


특히 여성에게 '아줌마'라는 호칭은 단순한 나이 표현을 넘어서, 일종의 사회적 평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치 "당신은 이제 젊음도, 매력도, 사회적 지위도 잃었다"라고 선언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남성들의 경우 '아저씨'라는 호칭도 비슷한 맥락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나이에 대한 평가는 더 가혹한 면이 있습니다.


내 이름을 되찾는 여정


"저기요, 저는 '아줌마'가 아니라 '김미영'입니다."


지난주 마트에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한 말입니다. 제 앞에 서 있던 젊은 여성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곧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사과했습니다. 그 순간 느낀 작은 승리감은 오랜만에 제 자신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퇴직 후 정체성의 혼란은 누구나 겪는 과정일지 모릅니다. 특히 직장에서의 역할과 직함이 자아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점차 깨닫게 됩니다. 내가 '과장님'이었을 때도, '아줌마'로 불릴 때도, 본질적인 '나'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요즘은 새로운 도전들을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그림 교실에 등록했고, 동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독서모임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저를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김미영'이고, 책을 토론하는 '미영 씨'입니다.


가끔 예전 회사 후배들과 만나기도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저를 '과장님'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는 그 호칭이 어색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제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과장님'도, 현재의 '아줌마'도, 미래의 '할머니'도 모두 저이며, 이 모든 호칭 너머에 진짜 '김미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식당에서 또다시 "아줌마"라는 호칭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화가 나거나 상처받는 대신, 미소와 함께 대답했습니다.


"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아줌마'라는 호칭 자체가 아니라, 그 호칭에 제가 부여했던 부정적 의미였다는 것을. 내가 그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상처가 될 수도, 그저 대화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물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호칭과 관련된 존중의 문화가 더 발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언어 습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변화를 기다리는 동안, 저는 먼저 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의하기로 했습니다.


퇴직 후의 삶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진짜 나를 채워 넣는 과정이며, 타인의 호칭이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줌마"라는 호칭은 더 이상 저를 정의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제게 말을 건네는 방식 중 하나일 뿐입니다.


오늘도 거울 앞에 서서 제 자신에게 말합니다. "안녕, 미영아. 오늘 하루도 너답게 살아보자."


그 누구도, 어떤 호칭도 내 진짜 이름과 가치를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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