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필요해
우리 모두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인정받고, 공감받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은 내가 나 자신의 마음을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책을 읽어도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감동받는, 마음이 움직이는 부분이 달라진다.
몇년 전에 대학선배가 국제개발에 대해 고민해보라며 책을 한 권 추천해 줬다. '히말라야 도서관'이라는 책이었는데, 존 우드라는 사람이 잘나가는 회사 경영팀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신이 두근거리는 일을 찾아 개발도상국에 도서관을 지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감동받은 부분은 우습게도, 주인공이 가치를 실현하는 부분도, 국제개발에 기여한 부분도 아닌,"회사는 나를 신뢰했지만 가족과 친구들은 점점 멀어져갔다." 라는 딱 한 문장이었다.
그 때는 내가 한참 여러 동아리활동에 욕심껏 참여하느라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밥 대신 잠을 선택하던 때였다. 일 잘한다고 선배들에게 칭찬받는 건 좋았지만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적어지니 나만 모르는 일이 자꾸만 생기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저 한 문장을 읽고 얼마나 마음 찡해졌는지 모른다.
나는 이렇게 내 자신의 공감을 허락해주는 과정이 여러 가지 감정으로 상처받은 나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노래를 들으면서 공감한다.
내 이야기같은 가사에 가슴 먹먹해지기도 하고, 내가 상처줬던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쓰라려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글을 읽으면서 공감한다.
내 마음 상태를 잘 표현한 문장에 푹 빠져 몇번이고 다시 읽기도 하고, 메모해 놓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림을 보고 공감한다.
어떤 그림은 붓 터치만 봐도 짧은 몇 초만에 강력하게 힘을 줘서 찍어냈다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런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붓 터치를 보고 속이 시원해지는 일탈 아닌 일탈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글, 그림, 음악 등을 감상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직접 창조해내는 사람도 모두 치유의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공감받고 싶어 한다. 누군가는 영화를 통해, 누군가는 페이스북 좋아요를 통해, 누군가는 술자리에서 친구의 공감을 통해.
대부분 이렇게 남을 통해, 남의 작품을 통해 공감을 하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라는 사람, 나 자신에게 감정을 허락하는 순간인 것이다. '내'가 남에게 관심받고 싶고 공감받고 싶어 한다기 보다는 '나 자신의 감정'이 공감받기를 원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그래서 내 내면의 목소리에 항상 귀 기울여주고 그 목소리를 존중해 줘야하는 것이다.
특별한 행동으로 남에게 관심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나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공감받지 못해서, 내가 내 자신의 감정을 공감해주지 못해서 '남이 평가하는 나'를 내 모습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사실 서툰 연애를 할 때의 내 모습이 그랬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아는건데.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내'가 존중해줬어야 했다. 내 행복은 '내'가 만드는 거였다.
어쨌든
내 눈으로 본 세상.
내가 쓰는 글은 말 그대로, 내 눈으로 본 세상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내 글을 차분히 읽어주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글 속 어느 한 구절이라도, 자기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고 어루만지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