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일 차 아기 육아일기
나는 학창 시절부터 미리미리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미리 준비하진 않더라도 결과에 대한 기준이 높은 편이어서 데드라인에 맞춰 최상의 결과를 내는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에도 비슷했다. 시험 전날 저녁까지 전공서적을 한 번도 살펴보지 않고 교외 활동을 신나게 하다가 시험 전날 저녁부터 밤을 꼴딱 새워서 노트 정리를 하고 그 부분만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며 벼락치기 공부를 그렇게 해댔다.
운이 좋게도 벼락치기에 별로 실패한 적은 없었던 거 같다. 벼락치기를 무사히 해내면 굉장한 쾌감이 든다. 하지만 벼락치기를 하면서 진심으로 후회한다.
왜 이렇게 인생을 바쁘게 살까. 미리미리 했으면 더 차분하고 얼마나 좋았을
완성 퀄리티도 훨씬 높았을 텐데.
이렇게 매번 진심으로 후회하지만 비슷한 상황이 되면 결국엔 또 벼락치기다.
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대학 시절이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육아하면서 거의 매일 느끼고 있다.
태어난 지 정확하게 6개월이 되는 날, 바로 오늘이다. 많이들 생후 180일부터 이유식을 시작하는데 러프하게 6개월부터 시작해도 괜찮단다.
첫 이유식인 만큼 나도 기대를 많이 했다. 2~3일 전부터 만들어 먹어 보고, 보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짬이 나지 않았다. 요즘 나는 축복이 잠을 재우는 데 진을 빼서 생활이 그야말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결국 이유식 시작 전날까지도 아무것도 만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축복이를 재우고 육아 퇴근 후에 만들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9시 반에 자기 시작한 축복이가 10시 반에 한 번, 11시 반에 한 번 깨는 바람에 저녁 시간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 내가 잠들어 버렸다.
마치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잠드는 것 같은 찝찝함에 새벽 1시 반경에 잠에서 깼다. 이유식을 시작해야 하는 당일 되었으니 오늘은 무조건 해야만 했다. 그러니 비몽사몽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잘 만들어줘야 되지 않겠는가. 이유식 책 5 권을 읽어가면 공통적인 내용을 토대로 쌀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새벽 3시였다.
쌀을 불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데 그거라도 해놓고 잤으면 바로 이유식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쌀을 여러 번 씻고 30분 정도 불려서 믹서기에 놓고 갈았다. 그리고 냄비에 물을 넣고 끓였다. 요리 똥손인 나에게도 어려운 과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유자재로 뒤집는 아기를 돌보면서 동시에 할 수 있는 과정 역시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 만든 쌀죽을 시켜 큐브 틀에 넣고 얼리기로 마음먹었다. 친정엄마는 매일 즉시 만들어서 축복이에게 먹이라고 주문하셨지만 살림 초보인 나에게는 무리다.
요즘 이유식은 큐브 없이 논할 수가 없을 만큼 모두가 쓰는 방법이고, 얼렸다가 해동해서 먹어도 영양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니 위안 삼기로 했다. 물론 맛은 덜 할 것이다.
다 만들고 나니 축복이는 잠에서 깨서 울었다. 달래느라 새벽 수유를 하고 나니 4시. 또 깨서 달래니 새벽 6시였다. 그제야 잠들 수 있었다.
새벽 3시에 국자를 휘저으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거지? 미리미리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하지만 정말 우습게도 쌀 죽을 큐브틀에 넣어 냉동실 넣는 순간 자책감은 뿌듯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쓰면서도 스스로 생각하지만, 정말 나쁜 습관이다.
솔직히 내가 게으른 타입은 아닌 거 같다. 멀뚱멀뚱 유튜브나 보면서 시간을 보내느라 이렇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이 미뤄지는 것은 정말 내가 바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바쁜 게 진짜 바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육아를 하면서도 이렇게 허덕이게 되다니. 하긴,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데 육아를 한다고 달라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이러한 나의 성격이 내 삶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내 필명이 P맘한입이니 잘 지은 건가.
하지만 이 모습을 축복이가 보고 배우는 건 원치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내가 미리 하지 않음으로써 놓치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피해가 온전히 축복이에게 간다. 이제 이런 습관을 고칠 때가 왔다.
매일 새벽 3시에 이유식을 만들지 않으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