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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잘했던 엄마가 영유아검진 이후 불편한 이유

197일 차 아기 육아일기

by P맘한입
제가 말하는 대로 안 하셔도 돼요.
젖물잠 끊어야죠.
교과서적으로 저는 그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요.
근데 저도 아이 둘 키워보니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제 말대로 할지 말지는
엄마의 선택이에요.

2차 영유아 검진에서 의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된통 혼나고 온 썰 풀어보겠다.



생후 6개월까지 받아야 하는 2차 영유아 검진. 1차 영역 검진은 건너뛰었기에 2차 검진이 우리 축복이에게는 첫 영유아 검진이었다.


자세히 봐주는 걸로 유명한 병원몇 군데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경쟁이 치열하기도 하고 꽤 멀어서 일단은 집 근처 다니던 소아과에서 영유아검진을 하기로 했다.


우리 축복이가 목도 잘 가누고 날이 갈수록 지력이 더해가는 게 눈에 보여서, 발달상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수유텀이 짧고 젖물잠이 심해서 분명히 의사 선생님께 혼날 거라고 예상하고 덜덜 떨면서 갔다.





다행히도 대기는 별로 없었다. 온 김에 6개월 예방접종도 같이 했다. 두 번에 나누어 접종하도록 해서 B형 간염 예방주사를 맞고 로타텍을 먹었다. 축복이는 분노의 울음을 터뜨리는 와중에, 드디어 검진 시간.


그리고 영유아 검진 전에 작성한 문진표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젖물잠을 끊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젖을 빠는 것과 잠에 빠져드는 것이 연관이 생기면서 젖을 빨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아이가 되고, 그러니까 자꾸 깨는 거라고 하셨다. 그러면 아기도 제대로 못 자고 엄마도 제대로 못 자서 결국엔 아기는 짜증이 많아지고 엄마는 피곤해서 육아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 답답한 것이 그걸 모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안 주려고 해도 떼를 쓰며 줄 때까지 안 자고 우는데... 내가 초보라서 그런 건지, 유난히 마음이 유약해서 그런 건지 그게 너무 어렵다.


시도를 해봤냐고? 한 달 전에 한 3주~1달 정도 젖물잠을 끊기 위해서 엄청 노력했었다. 그래서 잠깐이나마 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 방심하자 어느새 젖물잠은 축복이의 고질적인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새벽 수유 또한 빨리 끊어야 한다고 하셨다. 뭐 당연히 예상했던 바다. 몰라서 안 끊는 게 아니라 못 끊고 있는 상황이니까.


또한 전문가적 소견에서 축복이의 얼굴색만 봐도 철분이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완모 하는 아기의 피부가 약간 노랗다고, 그래서 철분제 섭취를 권하셨다. 돌까지는 먹어야 하고 먹더라도 철분이 부족할 수 있다 하셨다. 모유수유아의 숙명인가 보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축복이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셨다. 그리고 뒤집기, 되집기 잘하는지, 목을 잘 가누는지 엎드려서 잘 노는지, 이유식을 시작했는지를 물으셨다.


모두 그렇다고 하자 더 궁금한 게 있냐고 하셨다. 그럼요, 힘들고 궁금한 거 정말 많죠... 나는 준비해 온 질문 리스트를 하나씩 읽어나갔다.


✅️ 영유아검진 2차 질문
-키 및 몸무게 정상인지?

: 키 86%, 몸무게 77% 발육 문제없음


-머리둘레 어떤지?

:84%.... 키, 몸무게와 같이 가는 정도이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


-다리 올렸다 내렸다 쾅쾅 왜?

: 그냥 재밌어서!


-혀를 자주 날름거리는데 이유가 있는지?

: 재밌으니까!!


-혀 설소대 괜찮은지 봐주세요.

: 젖 빨아먹는 데 문제없었음 괜찮은 거다.

(말로만 하지 마시고 기왕 왔는데 혀 모양 좀 봐주시지ㅜㅜ)




젖물잠과 새벽수유를 끊으려고 노력해 봤는데 도무지 성공하지 못했다며 어떡하냐고 내가 묻자 선생님께서는 무심하게 말씀하셨다.

제가 말하는 대로 안 하셔도 돼요.
젖물잠 끊어야죠.
교과서적으로 저는 그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요.
근데 저도 아이 둘 키워보니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제 말대로 할지 말지는
엄마의 선택이에요.




병원에 다녀오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제 진짜 또 젖물잠을 끊기 위한 전쟁을 재개해야 하는가. 아님 그냥 이대로 지내다가 축복이가 크면서 저절로 습관을 끊을 수 있길 바라야 하는가.


나는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몇 시간이나 축복이를 울릴 자신도, 우는 소리를 들을 자신도, 몇 시간이나 품에 안고 돌아다닐 자신도 없었다. 그럴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두기로 했다. 최선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그런데도 기분이 좋지 않고 자꾸만 가라앉았다. 왜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늘 권위자(부모님, 선생님)의 인정을 받았고 권장하는 정답 내지 최선의 루트를 따르던 사람이다. 그렇게 하는 게 잘 사는 길이라 생각했고 그게 마음도 편했다.


하지만 육아를 하면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부딪히니 최선의 길이 아닌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 자체로도 마음이 불편한데 권위자에게 딱딱하고 부정적인 피드백까지 받으니 속상한 거다.




하지만 그게 인생이 아닐까. 맘먹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만 된다면 부처도 인생을 고해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어른이 되는 중인가 보다. 진짜 인생을 배워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영유아검진을 다녀오고 별생각을 다 하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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