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현실일 수 없는 이유
삼국지 소설 내지 게임을 접하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착각 중 하나는, 사람의 충성심에 대해 손쉽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명하고 중요한 장수들이 유비나 조조, 손권을 목숨 걸고 보위하는 모습이 반복해서 나오다 보니 그런 충성이 흔하고 당연? 하게 여겨진다는 것인데 물론 이는 크나큰 착각이다.
난세에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는 그런 깊은 충정은 절대 흔한 일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이나 자신의 삶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수틀리면 내가 먼저 살려고 기존의 군주를 내버리고(심지어 '제껴' 버리고..) 군복을 바꾸어 입는 건 당시 시대에 흔하고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조금만 깊게 들어가 보아도 답이 나오는 게, 삼국지에서 이름 있다 하는 저명한 장수들 중 처음 복무한 세력과 마지막까지 함께 한 세력이 일치하는 경우는 잘 없다. 여포나 화흠, 위연처럼 '대놓고 하자가 있다 여겨지는' 인물이야 말할 것도 없고 장료, 감녕, 순욱, 법정, 장합, 조운, 태사자, 진궁 등등 제법 괜찮게 나오는 인물도 상황과 필요에 따라 주인과 소속을 바꾸곤 했다. 한 세력에 몸담은 이가 변심하지 않고 계속 쭈욱 그 세력에 머무는 사례가 오히려 적은 것이다.
물론 유비나 조조, 손권에게 들어간 이후로는 변심하는 경우가 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사례들로 보면 이는 그 장수들이 원래 충성을 잘하기 때문이라기보단 마지막에 선택한 군주의 인품과 리더십이 출중했기 때문이라 보는 게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특히 유비 같은 경우는 오랫동안 기반을 다지지 못해 방랑세력으로 천하를 유랑했었데 이러한 상황에선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무언가 '보상'을 해 주기 무척 힘들었을 것임에도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따르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리더십이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유비진영에서 소위 배신자가 두드러지게 출몰하는 시점이 역설적으로 유비가 파촉에서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난 뒤라는 것이다. 그 배신행렬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는 '미방'을 보자. 미방은 '유비 서주'시절부터 형 미축과 함께 목숨 걸고 유비를 따라다녔던 개국공신이다. 만약 이 사람이 손쉽게 딴마음을 품는 그런 유형이었다면, 유비가 개뿔도 없이 쫓겨만 다니던 장판파 시절에 이미 변절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힘겨운 유랑시절에는 화살을 맞아가면서도 꿋꿋하게 유비를 따르던 이가 형주에서 관우의 지휘 아래 있게 되자 통수를 치고 돌아선다. 이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서로 간의 관계여부에 따라 사람의 마음과 태도가 어떻게 돌변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그리고 추가로 관우나 장비 같은 인물은 세력의 리더로서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까지..)
삼국지 게임에선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너무나 쉽다.
한 세력으로 게임을 시작하면 제일 처음에 하는 일이, 모든 장수들을 충성도 순으로 정렬해 놓고 가장 낮은 이들부터 주둥이에 '떡고물'을 때려 박는 것이다.(애초 사람의 마음이 가시적인 수치로 표현되어 군주에게 보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손쉬운 '치트'인가!) 그렇게 충성 낮은 순서대로 떡고물을 때려밖아 모든 장수들의 충성도를 100(관우 장비급 충성)으로 만들어 놓고 나면 군주가 죽을 때 까지 배신이 나오는 경우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러니 게임이 확 쉬워지게 되고, 사람의 충성을 사는 게 쉽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통치를 그따구로 한다면 바로 엄청난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충성도가 낮은 순서대로' 포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포상을 받은 이들은 '충성을 안 했기 때문에'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럼, 처음부터 사심 없이 철저하게 충성했던 애들은 뭐가 되지? 그럼 나도 충성 안 하고 개겨(?)야 상 받겠네? 결과적으로 상을 받지 못한 골수 충성자들의 충성도가 수직하락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따르던 이들이 "충성을 안 해야 상을 받는다."라는 포상방침(?)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이들의 충성을 다시 올리는 건 몇 곱절 더 힘들어지게 된다. 이걸 또 '같은 방식으로', 돈으로 해결하려 했다간 충성은 충성대로 놓치고 돈만 쏟아붑다가 세력은 파산에 이르게 된다.
현실에서는 보통 반대로 한다. 이미 충성도가 100인 이들에게 포상을 하는 것이다. 이로써 세력에 대한 헌신이 아직 부족하다 여겨지는 이들에게 "너도 헌신으로 충성을 보인다면 마땅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장수들 입장에서 충성을 보여야 할 동기가 부여된다. 반대로 너무 충성하지 않는 이들은 포상이 아닌 일벌백계를 하여 "불충하면 처벌받는다."라는 사례를 남겨야 한다.
물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돈 몇 푼 주고 뺏는 정도로 오가는 건 아니다. 접하는 이들의 말과 행동, 감정적 교류 속에서 수십 번도 더 바뀌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게임과 달리, 관우, 장비, 제갈량, 방통, 위연, 양의, 법정 이런 애들 데리고 내부 분란 없이 1년 동안 세력을 유지한다는 게 결코 게임처럼 쉬운 일일 수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