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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스토킹 이야기

자존감이 행실에 미치는 영향

by 박세환

유비의 부하들은 대부분 유비의 인품에 반해 목숨 걸고 충성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모든 이들이 다 그러했던 건 아니다. 게 중엔 유비를 아주아주 싫어했으면서도 마지못해 따른 이도 있는데 이를테면 유파라는 이가 그러했다.


유파는 유표시절 형주에 살았는데 유표 사후 조조가 남하를 해오자 많은 선비들이 유비를 따라갔음에도 유파는 유비가 싫어 조조를 따르게 된다. 하지만 조조는 적벽에서 대패한 뒤 형주 남부의 영향력이 흔들리자 형남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유파를 형남으로 보내려 한다. 유파는 조만간 승기를 잡은 유비가 형남으로 진출할 것이고 그럼 자신은 형남지역과 함께 '너무 싫은' 유비의 수중에 떨어질 게 뻔하다고 거부감을 표명했지만 조조는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군대를 보내 지켜줌ㅇㅇ"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결국 유파를 형남으로 내 던져버리고야 만다. 결국 모두의 예상대로 유비는 형남으로 진출해 그 지역을 석권했지만 적벽의 패배를 수습하느라 바빴던 조조는 '당연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보는 눈만큼은 거의 신적 경지에 이른다던 유비는 유파가 자신의 영역으로 떨어졌음에 기뻐하며 기다렸다는 듯 러브레터 구애 공세에 나서지만 원래 싫은 놈이 이질X 하면 곱절은 더 싫어지는 법. 유파는 안 그래도 싫은 귀 큰 놈이 자신에게 질척거리자 질색을 하며 짐을 싸 남방 교주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그곳에서 군주 사섭과 트러블이 생기자 이젠 아예 남방루트로 익주 유장한테까지 찾아가 귀순하게 된다. 교주, 오늘날 베트남의 북부지역즘 되는 이곳은 삼국시대 때만 해도 거의 불모지에 가까워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시리즈마다 구현이 되다 말다 하는 그런 곳이다. 교주에서 익주로 가는 남방루트는 한 술 더 떠 그냥 야생의 영역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삼국지를 배경으로 한 모든 게임들을 통틀어도 이 '남방루트'가 구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금처럼 고속도로 철도 교통시스템이 발달한 시대도 아닌데 짐을 싸서 그런 불모지들을 헤집고 다닌 걸 보면, 유비가 대체 얼마나 싫었던 것일지 짐작조차 어려울 정도. 하지만 우리는 '그다음'을 알고 있다.



유장은 북쪽 장로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이를 막기 위해 유비를 익주로 불러드리려 한다. 당시 시대 문명지도 아니었던 대륙 남부 밀림지역을 헤집으며 죽자 사자 익주까지 들어왔던 유파가 이 소리를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를 짐작하는 건 아마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유파는 거의 발작적인 반응을 보이며 거품을 물고 반대하지만 결국 이번에도 야속한 운명의 여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결국 유비는 익주로 들어왔고, 창 끝을 돌려 유장과 싸움을 시작했으며, 성도가 포위당한다. 유파는 죽기 아님 까무러치기, 최후까지 저항하다 죽고 끝내자고 청했으나 결국 유장은 마지막까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서 유비에게 순순히 항복을 해 버린다. 이제 유파와 유비의 재회는 피할 수가 없다.

.. 결국 그렇게 유파는 유비세력으로 편입되고야 말았다.(인간적으로 이 즘 되면 다리가 풀려 더 이상은 도망칠 힘도 의지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마지못해 끌려와 편입되다 보니 충성심 같은 게 있을 리 없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이왕 한 편이 되었으니 앞으로 잘해 보자고 장비가 술과 고기를 챙겨 유파를 찾아갔는데, 유파는 자신과 같은 선비가 왜 너 같은 무식한 무뢰배 따위와 어울리겠느냐며 만나주지도 않았다. 이에 개빡친 장비가 유파를 패 죽이려고 하는데 제갈량이 뜯어말려 간신히 넘어갔다는 이야기. 유파가 유비세력에서 진정으로 잘 지내보려 했다면, 유비의 의형제이자 실세인 장비를 이따위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찌 되었건 유비는 맥락을 불문하고 평소 눈여겨보던 유파가 들어왔음에 만족스러워하며 그에게 촉나라의 기획재정부 장관직을 수여한다. 그리고, 확실히 유비의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그 속 마음이 어떠하건 능력만큼은 가짜가 아니었던 유파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촉의 경제를 훌륭하게 재건해 내었는데, 삼국중 가장 약체이면서도 제갈량 5번, 강유 7번의 북벌을 감내하며 위, 오와 맞설 수 있었던 그 경제의 기반이 바로 유파에게서 나온 것이라 한다.


참고로 유파는 222년 숨을 거두면서 드디어 유비로부터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유비는 1년 뒤인 223년 하늘나라로 호적으로 옮김으로써 악착같이 그 뒤를 쫓아갔다고 한다.




아름다운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삼고초려 역시 제갈량 입장으로 돌려 생각해 보면 분명 스토킹의 여지가 있다. 형이 이미 손권 아래서 벼슬을 하고 있던 제갈량 입장에선 굳이 기반도 없던 유비 아래서 일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쨋든, 이유가 무엇이었건 한 두 번 피했으면 눈치껏 알아야 할 거 아닌가? 그런데 안 만나주면 만나줄 때까지 들이받는답시고 기어코 세 번째까지 찾아와? 그것도 불한당같이 생긴 '동생들'까지 대동하고서 말이다. 그 '동생들'이 옆에서 형님형님 거리고 있는 장면 자체로 이미 충분히 공포스러운데 심지어 장비는 "집을 불살라버리겠다!"라는 대사까지 쳤다! 그런 것들이 자기 낮잠 자는데 깨우지도 않고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한다. 깨고 나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 심하게 충격을 받은 제갈량은 결국 유비 쪽으로의 임관을 수락하고야 만다. 여하간, 유비에게는 분명 스토킹 기질이 있었다.



스토킹에 대한 선악 판단은 치자하고 이러한 일화들을 통해 드러나는 유비의 정신적 특질에 대해서 좀 논해보고 싶다.


개인적 판단이긴 한데.. 스토킹을 하는 정서적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본다. 하나는 자존감이 극단적으로 낮은 유형. 자존감이 낮으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의존적이 되는데, 이 상태에서 끌림을 느끼는 상대의 인정을 극단적으로 갈구하려 하다가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그럼 또 다른 유형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 자존감이 극단적으로 강한 경우이다.

스토킹을 받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가하는 것 역시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만약 몇 번 들이대서 상대가 내 마음을 받아주면 그건 스토킹이 아니지. 스토킹이 성립된다는 건, 꾸준한 대시에 상응하는 꾸준한 거절이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지간한 사람은 그 거절에 지쳐서라도 결국 스토킹을 포기하게 된다. 일단 자존심 상하는 걸 견디기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자존감이 극단적으로 높은 사람은 다르다. 이러한 거절, 짓밟힘 하나하나에 큰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대범함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토킹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기반이 된다.


아마도 유비는 후자였을 것이다. 애초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면, 온 천하를 유랑하는 그런 굴곡진 여정을 정신적으로 감당해 내기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힘겨운 여정 속에서 군주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면 아마 사람들이 그렇게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패배와 유랑에도 무너지지 않고 한실재흥의 꿈을 유지하며 꿋꿋하게 나아갔던 걸 보면, 유비는 분명 극단적으로 자존감이 강한 유형이다. 그리고 어지간해선 사람에게 모질게 대하지 않았던 그 특유의 인품 역시도 '극적으로 높은 자존감'에 기인했을 것이다. 상대로부터 어지간히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이를 큰 모욕으로 여기지 않았으리라.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이 강해야, 강한 만큼 낮출 수도 있게 된다. 자신이 진정으로 약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은, 두려워서라도 함부로 자신을 낮출 수가 없다. 어쭙잖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가 행여나 빈곤하고 초라한 자신의 볼품없는 실체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작은 모욕에도 참지 못하며 이때 드러내는 분노는 역설적으로 공포라는 근원감정에 기반한다.

하지만 유비는 넘치도록 과도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수많은 패배와 역경을 거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무수한 인재들을 얻고 천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막말로 조조와 '영웅'을 논하다가 천둥소리에 맞추어 탁상 아래로 기어들어간 것도, 형주 뱉어내라 따지러 온 노숙 앞에서 엉엉 울어버린 것도, 설령 필요에 의한 절묘한 연기라 하더라도 보통사람은 이렇게 하기 어렵다. 가오 떨어지니까. 유비는 유비라서 하는 것이다.


사마의에게 두어 번 거절당하고 나서 "니가 그렇게 잘났어? 한 번 더 거절하고서 나한테 절단 나거나 그냥 존말할때 기어 나오거나 알아서 잘 판단해라."이렇게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킨 조조였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리고 그 사마의는 결국 위나라를 절단내고야 만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유파는 유비의 황제등극에 반대표를 던졌다. 정말 특이한 건, 유비는 애써 그런 유파에게 자신의 황제등극 표문을 작성하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유파는 꾸역꾸역 그 역할을 해 내긴 하는데, 유비의 심성도 정말 독특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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