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드러나는 거짓명분이 아닌 본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삼국지 이야기를 해 보자. 유비가 동족인 유장을 공격해 익주를 빼앗은 일은 평소 유비 스스로가 그토록 강조해 왔던 유교적 인의에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 자체로는 명백히 부도덕한 일이었고, 실드의 여지는 없다. 당연히 조조 쪽 사람들은 SNS를 통해 이를 죽어라도 물어뜯었겠지.
"야ㅋㅋ 평소 그렇게 '인의' 강조하셨잖아요ㅋㅋ 동족 침공해서 땅 뺏어먹는 게 그토록 강조했던 '유비의 인의'세요? 엌ㅋㅋㅋㅋ"
"왜? 조조는 인의도 없는 ssib새끼라 상종할 수 없다고, 덕 있는 유비가 천하를 얻어야 한다면서? 참 대~~ 단 한 '인의' 납셨죠?"
하지만 이렇게 조롱한다 해서 유비 쪽 사람들이 설득(?)되는 경우가 있었을까? 당연히 그런 거 없었다.
유장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후 유비가 열었던 성대한 연회에서 방통이 "남을 공격한 뒤에 너무 즐거워하면 세상이 좋게 보지 않는다."라고 말을 꺼내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던 일화를 보면 당시 이러한 유비의 침공을 탐탁지 않게 보는 천하의 시각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충격을 받고 돌아서는 유비 쪽 여론은 없었다. 다들 찝찝함이 있지만, 또한 상황을 수긍했던 것이다.
유장 측이 "가진 광물의 절반"을 내어놓지 않았으니 은혜를 모르고 비도덕 한 거 아니냐 이런 건 누가 봐도 그냥 억지 명분 만들기고 이런 거로 도덕적 명분 챙긴다는 건 솔직히 너무 가증스러운 일이다. 유장을 침공한 유비의 행태는, 그 자체만 따지자면 분명 비도덕 한 거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유비의 행태를 비난하지 않았던 건, "유장이 나빠서 침공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유비 측의 억지 명분을 정말로 납득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 조조라는 '거악'에 맞서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조조는 강력하고, 그 강력한 거악 조조를 무찌르려면 유비가 빨리 세력을 키워야 했기에 그 과정에서의 일부 부도덕은 그냥 함구하고 넘어가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천하의 주된 여론이기도 했다.
다시 말 하지만 '유장이 나빠서'라는 건 정치사회논의의 장에서, 정치시장에서 '표면적으로' 팔아먹는 흔해터진 거짓 가식 명분인 거고 실재 본심은 '유장이 나빠서'가 아니라 '조조가 (더) 나빠서'인 것이다. 때문에 유비 쪽 사람들을 상대로 "유비의 청을 거절한 유장의 부도덕성"이런 '표면적인' 명분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백날천날 지적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차피 그건 그들의 본심이 아니었고 그냥 쉽게 팔아먹고 버리는 명목상의 이유에 불과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본심은 유장이 아닌 조조가 싫다는 것이고 이 부분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절대 유비를 떠나지 않는다.
정치사회논의의장에서, 정치시장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주장들은 대부분 본심이 아닌 거짓과 가식 명분들이다. 이를 당신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아마 여러분들도 이를 알고는 있을 것이다. 그런 거짓 가식 명분을 '표면적으로' 올려놓는다 하더라도, 실재 진실되고 솔직한 본심은 다들 딴 곳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걸 모르고 정치사회논의의장에서 들어온 순진한 영혼들은 당연히 정치가 작동하는 생리를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우크라이나와 젤렌스키를 '더'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역시 같은 원리로 바라보면 된다. '젤렌스키가 더 나빠서'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를 비난하고 조롱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당연히 안되죠ㅋ 중요한 건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거짓 명분이 아닌,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본심이다.
지금 여러분들 주변에서 우크라이나와 젤렌스키를 비난/조롱하는 사람들의 평소 주장과 행보들을 보면 그들이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하나는 구좌파 반서방주의 계열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원래 서방세계 안 좋아하던 사람들.
또 하나는 페미 피씨 이런 거 싫어하다 결국 종교적 전통주의, 보수주의를 (저물어가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대안으로 여기게 된 이들이다. 종교적 성향이 강하며 '글로벌리즘' 내지 '딥스테이트' 이런 단어들을 입에 물고 산다.
전부터 말해 왔지만 우크라/젤렌 욕하는 이들의 98%가 여기 둘 중 하나로 들어간다 보면 된다. 여러분들도 솔직히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좌파와 우파로 서로 사뭇 달라 보이는 이 둘이 공유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서구 자유주의 지배질서체제를 탐탁지 않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서구식 자유주의 질서체제를 가증스러워하고, 내심 무너지기를 바라는 이들이며, 그러다 보니 그에 가장 대척점에 있다 여겨지는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체제에 대해 다소 호감을 가지게 된 이들이다. 결국 '본심'은 여기에 있다. 우크라나 젤렌이 나쁜 게 아니라, 그들의 배후에 있는(있다고 여겨지는..) '서구 자유주의 지배체제' 그 자체가 싫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서구식 자유주의 질서'를 향한 신뢰를 가진 사람은 젤렌스키나 우크라이나를 비난/조롱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와 젤렌스키의 일부 행보를 비판하는 걸 넘어, 우구라니 젤재앙이니 하며 조롱과 악담, 저주와 적대를 표명하는 이들은 이미 그 마음에서 서구 자유주의 질서 자체를 버린 이들이다. 서구식 자유주의 질서의 붕괴를 염원하며 내심 러시아가 대안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상태에서 가능한 태도라 보면 된다. 다시 말 하지만, 표출되는 거짓명분이 아닌 속에 들어있는 본심까지 보여야 정치를 볼 줄 아는 것이다.
때문에 "우크라이나와 젤렌스키가 너무 나빠서" 비난/조롱한다는 그들의 '표면적' 명분을 공격하는 건, 그들을 설득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속에 들어있는 그들의 본심인 '서구 자유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의구심' 그 자체를 논하는 게 훨~~ 씬 생산적이다. '서구식 자유주의 질서'를 긍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차피 죽었다 깨나도 우크라이나와 젤렌스키를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려죽여도 긍정 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