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을 향한 어떤 충정들
수년 전 인상 깊게 언급했었던 영화 '마이웨이' 이야기이다.
2차 세계대전의 노몬한과 스탈린그라드—이름조차 저주받은 그 지옥 같은 전장들에 두 사람(장동건과 김인권)이 있었다. 식민 치하의 조선인으로써 둘의 시작은 같았지만 난세는 둘을 다른 식으로 바꾸어놓았고 결국 죽음의 문턱 앞에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선택을 내리게 된다.
그 모든 싸움이 그저 '조선인인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었던 장동건은 쏘오련이건 독일이건 손쉽게 항복함으로써 삶을 지속하려 했다.
"일제건 소련이건 독일이건 나발이건 조선인인 우리에겐 전부 남일뿐"
그러나 김인권은 달랐다. 같은 조선인이었지만 살려고 발버둥 치며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는 소련군과 섞이게 되었고, 같이 먹었고, 울었고, 싸웠다. 태어난 조국이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그들과 부딛기며 살다 보니 쏘오련은 그의 기억과 삶과 감정이 깃든 '생활의 터전'이 되어버렸고, 그는 장동건처럼 그들을 손쉽게 남으로 치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말했다.
“너한테는 그렇겠지! 하지만 나에겐 아니야!”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념과 라포, 혹은 단지 ‘받아먹은 정’에 대한 충성을 안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결국 '쏘오련을 위해' 산화한다.
이 장면은 오랫동안 내 마음 한편에 매우 인상적인 한 점으로 남아 있는데
아주 불명확한 충성, 논리적이지 않은 선택, 이상과 무관한 희생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인간적인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장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풍경을 자주 본다.
처음엔 페미니즘에 분노하고, 정의를 외치며 광장의 언어를 조율하던 많은 이들이 언젠가부터 ‘우파’라는 진영 속에서 자리를 잡았고, 어찌어찌 그렇게 '산업화 태극기 반공보수'가 되었다.
누차 말 했지만 '산업화 태극기 반공보수'의 지도자들은 반페미 같은 거 X도 관심 없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매로 쳐도 그런 거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젠 '그들' 스스로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거기'로 들어가 한솥밥을 먹다가 이래저래 빼박 '같은 진영'이 되어버린 이들이 손쉽게 다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의 이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래저래 살다 보니 '그들'이 되어 삶의 뿌리가 박혀버린 이들에게 거기서 다시 나온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그들에게 “왜 아직도 거기 있어? 거기는 '우리'가 아닌 '남'아니야?”라 묻는다면, 아마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너한테는 그렇겠지. 하지만 나에겐 아니야.”
살아가다 보니 잃어버려야 했던 것들에 대한 어떤 애잔함이 깃들어있는 그 대답 말이다.
이 글은 비난도, 찬사도 아니고 그저 지나가던 하찮은 이의 덧없는 심상 한 점일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0PKTa9Q6rso
이 동영상은, 지금 시점에서 산업화 진영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다 자연스레 뇌리에 떠오른 영상이다. 물론 여러분들이 48분이나 되는 저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필요는 없다. 그냥 '34:23~38:25/43:45~끝까지' 이렇게 9분가량만 보면 된다. 그 정도면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