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만 알고 배열을 모르는 자들의 한계
언제부턴가 팩트 팩트 거리는 것이 유행이 된 것 같다. 진중권이 한때 ‘팩트’를 강조했었고, 일베충들이 ‘(우덜식) 팩트’를 하도 강조하고 다녀서 그리 된 것 같다.
물론 사안의 팩트는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도 정도라는 것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인문사회와 같은 가치판단의 장에 있어서 팩트는 아무리 중요해도 그저 ‘일부’ 일뿐이지 절대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치판단에 있어서 관련 사안의 팩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팩트들을 어떻게 나열하고 또 그로부터 어떤 결론을 이끌어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팩트’보다 중요한 ‘해석’의 문제가 된다.
A와 B가 둘이 싸웠는데 A를 편들고 싶은 사람은 B가 A를 공격한 측면만 이야기하고 반대의 측면은 의도적으로 누락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팩트’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소위 말하는 ‘고수’들이 논쟁의 장에서 매번 반복하는 짓이다.
가난한 소수인종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 이것은 팩트이다. 우파는 이를 바탕으로 “소수인종들은 역시 쓰레기”라는 ‘해석’을 이끌어낸다. 좌파는 이를 바탕으로 “소수인종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몰아세운 주류 인종들의 문화적 억압성”이라는 ‘해석’을 이끌어낸다.
진짜 고수라면, 논쟁의 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구도를 끌고 가기 위해 애써 팩트 자체를 깨버리는 하찮은 짓을 시도하지 않는다. 고수들은 이미 확정된 ‘팩트’들을 최대한 유리하게 선택하고 조합하여 이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최적의 해석을 도출해 낸다.
(정치 사회 논쟁의 고수 입장에선, 그 어떤 팩트가 있어도 이를 취합하여 자신이 원하는 해석과 결론을 입맛대로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생각 외로 팩트 그 자체엔 크게 집착하지 않는 듯 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팩트 팩트 거리는 풍조를 불편하게 생각해 왔던 이유 역시 여기서 나온다. 관련 사안의 팩트 문제에 너무 집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버리면 정작 중요한, '해석‘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수들은 이런 빈틈을 급습하길 좋아한다.
당신은 ‘소수인종 출신 범죄자의 살인행위’라는 ‘팩트’로부터 ‘주류 인종의 문화적 억압성’이란 '해석'을 이끌어내는 이에게 동의할 수 있는가?
정치 사회 논의의 장이란 결국 각종 ‘해석’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논의의 장에 보다 잘 적응하길 원하는 이라면, 팩트도 좋지만 ‘팩트에 대한 해석’이라는 측면에도 조금 관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야기를 조금 추가해보자면
일베와 같은 넷 우파들이 그렇게 설쳤(?) 음에도 그 짝 동네에서 박가분씨 정도 되는 셀럽을 하나도 탄생시키지 못한 것은 개인적으로 그들이 ‘팩트’의 문제와 ‘배열’의 문제를 구분할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변X재? 윤X인? 씨바 그냥 말을 하지 말자 엌ㅋㅋㅋㅋㅋㅋ) 물론 그들이 말하는 ‘팩트’가 보편적 ‘팩트’와 많이 어긋난 것도 있겠지만.
진중권한테 처 발린 ‘간결’이 팩트의 문제만 알고 배열의 문제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얼치기 인터넷 논객의 전형이었다고 본다.(개념 차원에서 팩트의 영역과 배열의 영역을 아예 구분하지 못했다.) 진중권이 그 팩트와 배열의 간극을 비집고 들어서자 간결은 찍소리도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팩트의 영역과 해석의 영역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이과 출신 사람들이 인문사회를 논할 때 심심찮게 드러나는 약점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들은 인문사회의 영역에선 이과의 영역처럼 딱딱 떨어지는 '팩트(정답)'가 나오기 어렵다는 '팩트(사실)'를 종종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