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남성은 사이코패스 극우 빌런이 아니다.

그들도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by 박세환

*한 줄 요약 : 젊은 남성들은 종종 ‘위악’(가짜 악당)을 연기하는 건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자기 고통을 받아줄 언어를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커 1은 여러 가지로 시사점이 많은 영화였다. 정치적 관점에서 역시 그러하다. 영화 속 '조커'는, (오늘날 세계 대안우파운동의 주범으로 몰리는) 젊은 남성들로부터 많은 공감과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리버럴, 여성 중엔 이 캐릭터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표명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조커는 범죄자일 뿐이고, 힘들어도 착하게 사는 이들이 더 많은데 애써 빌런을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냐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 차이 현상은 특정 국가에 국한되어 나타난 게 아니었다. '조커'가 방영되었던 많은 나라들에서 비슷하게 나타났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반응이 양 진영의 평소 패턴을 뒤집은 듯 보인다는 점이다.

평소 사회적 약자의 위법과 탈선을 동정의 눈으로 보자고 주장했던 쪽은 리버럴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벼랑 끝으로 내몰렸으면 범법까지 했겠는가.” 이에 대안우파는 늘 “법은 법이다. 일벌백계가 필요하다.”라며 맞섰고, 리버럴들은 “저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이라 되받곤 했다.(이러한 대립구도는 요 근래 일어난 우크라 난민여성 살해사건, 찰리커크 살해사건을 통해서 다시 반복 구현되고 있다.) 그런데 '조커'를 두고 이 구도가 역전된 것이다.


...



세계적으로 시끌시끌한 대안우파스러운 기류들이 '사회적으로 좌절한 젊은 남성층'을 주력으로 삼고 있음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그런 대안우파들에게서 심심찮게 나타나는 '위악적' 입장표명들(ex : "세상은 원래 약육강식이야!" "약자는 잡아먹혀 죽는 게 하늘이 정해준 섭리!" "사형이 팍팍 이루어져야 세상이 안정되는데 저 빌어 처먹을 리버럴 인권쟁이들 때문에...")로 인해 종종 '지금 시대의 젊은 남성들'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연민의식도 가지지 못한 악질 사이코패스 극우 파쇼로 매도되곤 한다.(주 리버럴들에 의해..) 하지만 영화 '조커'는 다른 현상을 보여주었다. '지금 젊은 남성들'도, 연민과 공감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 연민과 공감을 갈구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마치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민이 결여된 존재로 보여왔던 건, 정말로 그들이 매정한 사이코패스 악질 파쇼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이 악질 사패 파쇼라기보단, 그동안 연민 내지 공감이라는 단어를 독점해 왔던 리버럴 엘리트들이 현시대 젊은 남성들 입장에서 공명할 만한 약자 서사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막말로 지난 수십 년 동안 공감 내지 연민이라는 개념을 독점한 리버럴들은 이 단어들을 순전 자신들만을 위한 자위도구로 활용해 왔다. 미천한 출신의 신데렐라가 어찌어찌 재벌 귀족가에 시집갔으나 시어미의 박대를 견디지 못해 이혼소송을 걸고, 결국 시댁 재산 절반을 뜯어먹고 나오는 이따위 류의 서사가 공감과 연민이라는 타이틀을 꿰차는 세상. 더 이상 그런 특정 진영 특정 정체성들의 자위행위장면에서 어떤 긍정적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오직 혐오만을 느끼게 되었다 한들, 그것을 사이코패스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문제는 리버럴에게만 있지 않다. 리버럴들에게 “비인간적이다”라는 낙인을 찍힌 대안우파 청년들이 그 낙인에 반박하기보다 이제는 그냥 수긍해 버리는 모습들이 나오는데 이 역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남겨진 인간성'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리버럴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무시무시한 악마 빌런으로써의 이미지를 수용해서 스스로를 조커의 가면에 가두고 ‘위악’을 즐기며 아이러니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그 어떤 인간성조차 남아있지 않은 좆나게 무시무시한 사이코패스 극우 파쇼 대악마 조커 빌런 대안우파이다! 으하하하하하!"

"약육강식 조아! 약자 학살 조아! 파시즘 조아! 전쟁 조아! 으하하하하하!"



...


위선은 진짜 선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위악 역시 "진짜 악은 아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정말로 그렇게 악한 건 아님에도, 타자에 대한 반항심으로 애써 악을 연출하려 하기 때문에 '위악'이라 하는 것이다. 필자가 젊은 대안우파들을 깔 때 종종 '위악'이라고 표현했던 건, 그들이 그렇게 싸패 파쇼처럼 떠든다 하더라도 그것이 저들의 진짜 진심은 아니라는 의미 역시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는 말이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태생적으로 그렇게 사악하기는 쉽지 않다. 사악해 보이는 어떤 모습들은 사실 상처받은 내면의 발로이다. 그런고로, 나는 세계의 젊은 남성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적이 뒤집어 씌운 빌런 이미지에 스스로 도취되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들이 받지 못한 공감과 연민과 배려와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싸구려 연민을 구걸하라는 말이 아니다. 위악으로 빌런의 가면을 쓰고서 되지도 않는 센 척하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초라한 내면에 솔직해지라는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해지는 길이니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피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넘치도록 늘어놓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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