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있었으면
영화 '조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본다.
‘아서 플렉’은 세계 각지의 많은 좌절한 젊은 남성들에게 강렬한 친숙함으로 다가왔는데, 그들에겐 아서 플렉이 고립되고, 무시당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던 너 나 우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반면 이 영화에 불편함을 느꼈던 이들도 많았는데, 주로 리버럴 즈음으로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영화가 있기 전까지 ‘공감’내지 ‘연민’이라는 가치는 소위 리버럴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동안 리버럴은 사회적 약자, 피해자, 억압받은 소수자라는 단어들에 자신들의 이념적 잣대에 기반한 특정한 얼굴을 부여했다. 특정 피부색, 성별, 성정체성, 역사적 서사로 이루어진 '그 얼굴'만이 공감과 연민의 자격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얼굴들 중에 ‘아서 플렉’은 없었다.
영화 조커는 카메라 렌즈를 돌려 그늘에 묻혀 있던 '아서 플렉'을 약자의 이름으로 비췄다.
한 번도 연민받은 적이 없고 아무도 동정하지 않던, 리버럴의 도식 속에 주류 기득권으로 분류되어 있던 존재 말이다. 이는 흥미로운 반전이었고, 이 반전은 리버럴들의 심기를 긁었다.
사회적 약자의 위법에 대해 늘 이해와 공감을 요청하던 리버럴들은 조커가 보여준 ‘다른 종류의 약자’에 대해선 냉소와 분노를 터뜨렸다.
“왜 빌런에게 연민을 느껴야 하냐!”
“그는 단지 백인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관대하게 포장된 악당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연민이라는 감정도 정치 이념화된 시대의 증거로 남았다.
공감 연민 동정 등등 따뜻하고 좋은 언어들을 리버럴들이 독점해 온 세상에서 공감은 모두의 것일 수 없었고, 연민은 선택된 자만이 받을 수 있는 훈장이었다.
그동안 그 공감과 연민의 울타리에서 배제당했던 일단의 젊은 남성들은 영화를 보며 자기 존재가 살짝이나마 이해받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는데, 이는 그들의 삶 속에서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는 아주 생소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 고통을 말해도 될 거 같은, 비로소 '불쌍함'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거 같은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기분 말이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류 리버럴의 몰이해와 반발 속에서 다시 조롱당했고, 다시 혐오당했다.
결국 그들은 입을 닫고 비틀린 웃음과 기괴한 슬픔이 뒤얽힌 위악의 가면을 썼다. 그 위악은 연민이 누락된 자아의 껍데기와 선을 배신당한 이들의 복수를 상징한다. 자신들을 사패로 매도한 이들의 기대(?)에 스스로 부응하여 악마의 얼굴을 찾아 쓴 것이다.
“그래, 우리는 사이코고, 파시스트고, 전쟁광이다. 너네가 말한 그 괴물.”
“근데 우리가 이렇게 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연민을 줬던 적 있었냐?”
위악을 방치하면 진악이 되고 아서플렉은 그렇게 조커가 된다. 그렇기에 그들을 진짜 조커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는 마스크 벗은 그들의 맨얼굴을 바라봐주고, 힐난하기 전에 한 번 즘은 너의 입장도 들어보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서 플렉은 결국 그 말을 듣는데 실패했다.
영화 '조커'는 '그 말'을 듣지 못한 한 사람의 이야기였는데, 문제는 현실 세상엔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한 사람이 하나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지 못했던 아서 플렉들이 세상에 너무 많았고 결국 위악이 진악으로,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하는 속도가 인류문명의 자정능력을 멀찍이 앞질러 버린 실로 우려스러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냥 요즘 자유민주진영 국가들 돌아가는 양태들을 보고서 한탄하는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