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한 지도자의 최후
잠깐 딴 이야기 한 점.
1945년 4월. 독일 군수산업의 중추 루르 산업지대는 압도적인 전력의 미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다. 종말을 눈앞에 둔 제국은 가뜩이나 얼마 남지도 않은 군인들에게 '겁쟁이'내지 '변절자' 혐의를 뒤집어 씌워 도처에서 처형해 댔고, 조국의 미래를 포기하고선 루르 산업지대를 전부 자폭시키라 명령하는 등 광기에 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루르 산업지대의 방어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 본의 건 본의가 아니었건 마지막까지 나치독일에 헌신했던 그는 국민과 군을 비겁자 겁쟁이들이라고 매도하는 정부 방송을 청취하며, 자신의 충성이 한낱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곤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이런 정권을 위해 더 이상 헌신할 수 없다! 모델 원수는 더 이상의 의미 없는 희생을 막기 위해 (코흘리개와 노인들로 급조되었던..) 국민방위군 병사들에게 제대증을 발급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상황. 부하들은 항복하여 생존할 것을 권했지만, 모델은 단호했다.
"독일의 육군 원수는 살아서 적에게 항복하지 않네. 원수로써 조국에 승리를 주지도 못했고 수많은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내가, 이제 와서 나 하나 살아보겠답시고 적군 앞으로 나아가 두 손 들고 항복한다 외치는 장면을 나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군."
결국 그는 죽음을 극구 만류하던 부하를 정찰 보내놓고선 그 막간 사이에 기어코 스스로 목숨을 끊고야 말았다.
다들 아시겠지만 나는 방구석 히키코모리 출신이라 사람들과 부딪히며 사회를 배운 경험이 많지 않기에, 지도자나 리더십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책, 특히 2차 대전사나 삼국지를 통해 접해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지도자들은 대개 패배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저들은 내 지시에 따랐을 뿐 죄가 없소. 모든 책임은 내게 있소.”
“이제 내 몫을 치를 시간이군. 후사를 자네에게 맡기니 부디 부하들을 마지막까지 책임져주게”
적어도 지도자, 지휘관의 최후라면 이러해야 하는 것이로구나.. 그것이 '지도자'라는 거구나..
모두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졌던 리더의 마지막은 저러해야만 하는 거구나..
하지만 어쩌면 이 자체가 '실재하는 현실'을 접해본 적 없는 방구성 망상가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패배와 종말을 앞둔 어느 지도자의 모습을 실제로 접했을 때, 그 모습은 내가 기대해 왔던 어떤 모습이랑은 너무나 딴판이었으니까.
내 탓이 아니라 부하들 탓. 윤석열은 마지막까지 부하 탓만 해댔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대통령이었고, 주변 부하들이 충언을 하지 않아 사지로 몰렸다는 식으로 재판 내내 원망과 비방을 쏟아냈다.
원래 그다지 좋아하던 인간도 아니었고, 계엄 자체도 너무나 한심했지만, 무엇보다도 1년 동안 재판을 받으며 보여준 모습 전부가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었다. 잘못된 명령 하나로 그간 자신을 따르던 무수히 많은 인생들까지 전부 불구덩이로 꼬라박아 넣은 주제에 끝내 모든 책임을 아래로 떠넘기며 혼자 살아보겠답시고 빌빌거리는 모습. 잠시나마 오천만의 삶을 짊어졌던 대통령이란 작자가 보여줄 태도라는 게 정말 저런 것뿐이란 말인가!
정치에서 마지막 장면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다. 그건 한 서사의 결말이고 지지자들이 자기 선택을 합리화해 볼 수 있는 마지막 출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가 알량한 목숨보단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려 했다면, 결과는 망했지만 적어도 끝까지 대통령이었다는 정서적 잔향만큼은 보수 지지층 내에 깊게 새겨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윤석열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부하들과 지지자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어차피 망한 판국에 그냥 깔끔하게 체념하고서 "저들은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모든 책임은 내게 물으시오!" 이렇게 사자후 한 번 내질렀으면, 마지막에라도 이렇게 모든 걸 떠안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의 정치는 실패했을지라도 그의 이름은 지금보단 훨씬 덜 부서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를 통해 본 것은 그저 '지시는 내가 하고 책임은 남에게 전가하는 기이한 리더십' 뿐이었다. 결국 그는 거울에 비친 무너지는 운명을 참지 못해 거울을 들고 있던 부하를 탓하며 도망치려다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던 한심한 실패자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박정희 좋아하던 산업화 반공보수 중에도 윤석열의 마지막 '찌질한'모습에 격하게 실망해 돌아선 여론도 제법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 그리 생각해 보면 또 그 찌질함이 결과적으로 다행인 것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