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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Apr 26. 2020

"일자리를 늘렸다!"라는 신화

그래서 '어떤 일자리'요?

언제부턴가 '일자리'라는 것은 황금 내지 건강, 평화와 같이 그 자체로 숭고한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모든 정부가 경제를 이야기할 땐 항상 '일자리'를 들먹인다. "더 많은 일자리를 위해서 정부는 블라블라~"


문제는 이 '일자리' 담론에 무언가 중요한 요소가 결핍되어있다는 것. 

간단하게, 어떤 정부에서 "최저임금의 반도 못 받으면서 하루 12시간 주말도 없이 일 해야 하는 쓰레기 일자리(윙? 그거 동방의 어떤 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인 일자리 아니냐?)"를 대거 늘려 완전고용을 달성했다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잘했다!"라고 말하여야 할까?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불경기와 공항으로 많은 이들이 실업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 정부와 힘 깨나 쓰시는 대감님들이 모여 '노오오예'라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대거 보급, 모든 이들을 '노오오예'로 취직시킴으로써 실업의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면, 역사는 이를 잘했다고 평가할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신석기시대를 거치며 인류가 각종 계급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했을 때, 가장 아래에 있었던 '노예(종, 노비, 농노 etc..)'가 만들어졌던 가장 보편적인 경로가 바로 그것이었다. 전근대 시대, 가뭄과 같은 극단적인 위기가 발생하면 많은 자영농(오늘날로 치면 자영업자??), 자유민들이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고 몰락하게 되는데 이때 소위 말하는 '대감님'들이 이들을 '노오오오오예'로 수용(?)하게 된다. 


역사책에 보면 왕조 말기마다 항상 나오는, "대다수의 백성들은 노오예 상태가 되어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극소수의 귀족 대감님들은 이들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한없이 호의호식하고 있었다."라는 멘트는 다 그렇게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 속에서 '아름답게' 배웠던가? ("대감님들은 위기의 상황에 '노오오오예'라는 직업을 대량 보급하여 많은 백성들을 실업과 아사의 상태로부터 구원해주었다.") 


...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엔 이 패턴이 (아니, 명칭이) 조금  바뀌게 된다. 

"몰락한 시골 자영농들을 자본가들이 '노동자'로 대거 수용(?)하였다."

자기 스스로의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체, 자신의 노동력을 타인에게 제공하며 그 대가로만 연명할 수 있는 계층이라는 점에서, 어찌 보면 노동자는 노오오오예와 본질적으로 등치이다. 물론 문서적으로 노동자는 어디까지나 여전히 '자유민'의 위계에 놓여 있으며 그런 점에서 전근대사회의 노오예와는 분명 다른 부분이 있음에 대해선 마르크스조차도 인정하고 들어갔던 바 있지. 그런데 그게 실제로 얼마나? 


산업혁명 초기 도시 노동계층의 평균수명이 시골 자영농의 평균수명만 못하다는 점으로 보았을 때, 몰락 자영농이 노오예로 팔려가는 운명과 공장 노동자로 팔려가던 운명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달랐는지 생각해 봄직 하다는 것.

"노동자는 노오예와 달리 자유민이기 때문에 고용주라 해서 함부로 다루어선 안된다"라는 성문법이 있었다지만 상대가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상황에 그 '성문화 된' 규정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될 수 있었을까?


여하튼 결론은 '일자리'라는 그 자체에만 너무 의미를 부여해선 안된다는 것. 단지 일자리의 개수를 산술적으로 늘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받을 수 있어야 한다면, 전근대 시대 가뭄이 들어 대량의 몰락 자유민이 발생할 때마다 그들을 '노오오오예'로 취직(??)시킴으로써 사회의 실업률 해소에 일조해 온 전근대 시절 귀족 대감님들 역시 '일자리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칭송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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