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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Apr 24. 2020

'박정희스러운' 방법론

통치의 필연적 강압성을 악마화 해왔던 과거의 입장은 여전히 정당한가?

'진보'들에겐 노무현 정부의 처참한 말로가 분명 큰 정신적 외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그 과정 속에서


"세상을 너무 민주적으로, 이것 저것 다 수용하고 받아주면서 가려했던 과도한 이상주의 경향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세상엔 좋은 말로는 해결될 수 없는 갈등, 관계들이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우린 때론 강경, 냉혹해질 필요가 있다."


라는 결론을 얻었던 것 같다. 이야기하다 보면 종종 접한다. 

괜찮은 결론이다. 그런데 여기엔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민주화와 진보의 이름으로 집권했던 노무현 정부가 굉장히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이 사람 저 사람 말 다 들어주면서 그렇게 손해 보면서 꾸역 구역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통치는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 수십 년 동안 민주화운동의 궁극적 신념이고 목표였으니까! 지나치게 이상적인데 그 지나치게 이상적인 게 '진보진영'의 슬로건 이기도 했다고


만약 그것의 결과가 실패였고, 고로 더 이상 '그것'을 지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과거 민주화운동의 궁극적 이상에 일부 차질이 있었음 역시 인정할 수 있을까? 그들이 공권력의 필연적 강압성에 대해서 그동안 너무 악마 화해 왔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좌파지만 처음부터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 있어 '박정희스러운' 방법론을 어느 정도 인정해왔다. 애초부터 이 사람 저 사람 다 챙겨주고 다 들어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류의 말도 안 되는 이상론 따위는 존중하지 않았다.
만약 내 생각이 틀렸다면, 진보가 용납할 수 없는 위험한 사상이라면, 진보는 앞으로도 언제나 노무현 정부의 그 '실패한 관용(?) 정치'를 반복해야 마땅할 것이다.


+세상 문제들은 절~대 좋은 말만 가지고 해결되지 않는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어리석은 이상주의는 필연적으로 반드시 모두를 더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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