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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Jun 02. 2024

"그들이 나보다 더 불쌍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다."

자식을 차별한 것의 대가

이 역시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오늘날 진보 정체성 정치에 대해 "그들이 약자이고 불쌍자라는 건 인정하겠으나 그래도 온건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식의 '라이트 한'비판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 꽤 속이 뒤틀림을 느낀다. 그냥 그들이 약자이고 불쌍자라는 전제 자체를 아예 인정해주지 말라고ㅇㅇ

그들이 물고 빠는 피해 서사들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걸 지적하지 않고서 그저 그들의 과격한 방법론만 질타하겠다는 건 여성이나 이슬람이 불쌍한 피해자라는 전제 자체는 수용해 주겠다는 것 아닌가.




'진보'를 보면, 그 자신이 진정한 분노를 느꼈다기보단, 무언가 고결하고 위대한 자아상을 가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문화권력을 쥔 진보 주류 담론으로부터 주입식으로 이식된) 타인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정치사회의 장으로 뛰어드는 이들이 많다.

어떤 자체적인 문제의식이나 신념이 아니라 그저 문화권력을 쥔 진보 주류 담론이 A는 피해자, B는 가해자라 그러니까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되게 힙하고도 정의로운 청년상인 것 같아서 그냥 글로 가는 이들 말이야.


비록 똘끼가 넘치긴 하지만 대안우파 쪽엔 진짜 상처받은 이들이 많다. 갸들 보면 항상 빡쳐있잖아? 병맛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감정만큼은 진실한 게, 힘들고 어렵고 약자인데도 진보 문화권력에 의해 강자로 매도된 것에 대해 한을 품은 이들이 보통 대안우파로 오거든.(ex : 너는 냄져니까 가해자이고 고로 아파하거나 슬퍼할 자격이 없다!")


진보 쪽에 있는 정체성들은 설령 고통을 받았더라도 문화권력에 의해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정신문화관념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다. 내가 아플 때 그것을 위로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

강간을 당했건 강도를 당했건 '진보'의 범주 아래 정체성들은 문화권력을 통해 정신문화관념적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지만 대안우파들은 그렇지 못했다.



'위로받지 못한' 이들이, 역으로 강자이며 가해자로 몰려왔던 애들이 어째서 '위로받을 수 있었던 애들'을 자신보다 약자로 인정해주어야 하는가?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이들은 '민주진보 범주 하의 정체성들'이 '약자'라는 이름으로 위로받을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기만감을 느낀다.




역시 반복해 온 말이지만, 신좌파적이라 여겨지는 페미 피씨 정체성 피해서사들은 상당한 개량과 정정을 시도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시대에도 계속해서 주류 헤게모니 지위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들이 너무 심하게 커져버렸기 때문에ㅇㅇ

많은 우여곡절들이 있었음에도 여성, 청소년, 이슬람, 제3세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매번 강자, 가해자로 몰리고 영문도 모른 체 끝없이 비난받아온 이들의 분노는 계속해서 증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진보의 범주 아래서 항상 위로받았던 정체성들'도 결국 피를 보게 된다.   


카인이 아벨의 피를 요구하고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색동옷을 강탈하려 들 것이다. 그런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인데, 그날이 오면 자식을 차별했던 아버지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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