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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Aug 23. 2020

'미소년'을 소비하는 두 가지 방식 2

남성성과 여성성

전편 : https://brunch.co.kr/@pmsehwan/220


남초 커뮤에서 팔리는 오토코노코 캐릭터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성성을 드러내지 않으며, 설령 남성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상실하는 방향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캐릭터는 성전환 수술 내지 마법을 통해 완전한 여성으로 전환되던가, 완전한 육체적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정신적으로는 남성성이 완전히 소멸된 여성으로 변이 된다. 그것이 이 캐릭터들의 '완성'이다.(그런 의미에서 박하얀은 남초 커뮤러들이 가진 미소년에 대한 판타지 공식을 자신의 현실 인생을 통해 충족시켰다 할 수 있다.)


만약 캐릭터가 남성성을 되찾을 경우 역설적으로 캐릭터의 매력은 '망가진다'. 이 설정은 주로 그 오토코노코 캐릭터를 좋아하는 이들을 '엿먹이기' 위해서, 다분히 조롱의 의도로 차용된다. 오토코노코가 결정적인 순간에 근육질에 머리가 빠지고 수염이 두들두들 난 모습을 노출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눈갱'을 선사하고 엿을 맥이는 것이다.


중요한 건 위의 과정들 속에서 여성성이 철저하게 오토코노코 캐릭터의 '주'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 남성성은 단순한 보조적 의미를 너머 궁극적으로 척결되고 청소되어야만 하는 요소로까지 전락한다. 



원래 여성이 아니었던, '여성'을 기대할 수 없었던 대상에게서 가장 궁극적인 여성을 뽑아낸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전자의 사례들과는 철저하게 상반되게) 가장 극단적인 여성성 추구의 결실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건 시간이 지날수록 미소년에 대한 후자의 소비방식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는 거. 


...


20년 전만 하더라도 남성이 종국에 여성으로 '완성'된다는 이런 '신성모독적인' 설정은 있기 힘들었다. 모든 변이는 여성이었던 존재가 궁극적으로 그 '저열한 여성'을 내 던지고 남성으로 완전히 탈피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설령 미소년의 여성성에 다분히 집착하는 듯했던 스토리텔링에서 조차도 종국엔 그 미소년을 남성으로 되돌려 놓음으로써(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완전한 하나의 남성으로 탈피 or 거친 폭력을 통해 쌈마이 한 남성 전사로 재사회화) 작가는 자신이 '신성모독'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선을 깨지는 않았음을 사회로부터 입증받으려 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수면 아래서(여전히 주류의 위치로는 올라가고 있지 못하지만..) 일어나는 오토코노코 반동현상들엔 상당히 흥미로운 면이 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빌린 물건을 되돌려놓듯 최종적으로는 남성으로 복귀해야만 한다는 불문율을 따르지 않는다. 이들은 남성성을 상실하며, 그러한 상태로 대놓고 다른 남성들에게 어필되고 그 자체가 '완성'으로 여겨진다. 

 

+박하얀이 수술(남성 -> 여성) 엔딩을 선택했을 때, '남성으로의 전환'만을 바람직한 완성으로 인정해온 그 전통적인 규칙과 더불어 "여성성은 언제나 보조적 요소로만 존재할 뿐" "여성성은 노오예의 미덕으로 척결되야만 하는 요소"라는 식으로 징징대 온 어떤 페미 똥 멍청이들 역시 조롱당하는 거지. 그리고 그건 썩 괜찮은 조롱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이미 '여성성'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의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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