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에서 주황색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정치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로 이쪽 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반응이 있다.
"세환 씨는 각종 이념 용어들을 아주 정확한 의미로 사용 하진 않는 것 같군요."
그러면 난 이렇게 대답한다.
"예. 저는 정치이념 용어들을 원론서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보단 그냥 대중 사이에 퍼져있는 뒤틀리고 왜곡된 의미로 쓰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난 정치 사회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원론서에 나오는 정확한 의미에 집착하는 태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용어의 정확한 사용이 강제될 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상황은 일반 대중들 간 이루어지는 정치적 대화의 제한이다.(많은 경우 그들은 각 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별도로 배우지 않았다.)
정치적 대화의 자격이 이런 식으로 '소수의 배운 사람들'에게만 한정될 경우 무척 부적절한 현상이 뒤를 잊는데, 정치의 주류 담론이 일반 대중들의 인식과 괴리되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종종 비난하는, "신좌파 PC충"과 같은 현상은 훨씬 더 자주 발생할 것이고 그 강도도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정확한 용어 사용에 대한 요구'는 종종 기성 주류 정치세력이 자신들을 향하는 비난을 회피하는 기제로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특히 나쁘다. 이를테면 우리가 페미니즘을 비난할 때마다 심심찮게 접하게 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A : 페미니즘은 여자만 챙겨요. 완전 쓰레기야!
B : 어느 페미니즘 사상서에서 '여자만 챙기라'라고 언급하던가요? 어떤 페미니즘 사상가가 그런 사상을 주장하던가요?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를 고루 챙겨주는 바람직한 평등사상입니다. 그러니 공부하세요!
C : 맞아요! 만일 그렇게 주장하는 페미니즘 사상 분파가 설령 있다 해도, 당신은 "페미니즘의 분파인 XX페미니즘에서 주요 학자 XX의 주장은 어떠어떠함에 잘못되었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무턱대고 모든 페미니즘을 싸잡아 비판하시다니 상당히 불쾌하군요. 사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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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페미니즘뿐 아니라 기독교나 유교의 타락을 지적할 때도 종종 나타난다.(원론적으로 예수나 공자가 인간의 타락을 긍정한 적은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우리는 기독교나 유교를 '쓰레기'라 말해선 안된다.)
일반 대중들은 특정 사상의 개념에 대해서, 책보다는 그 사상을 신봉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를 통해 배우게 된다.
세상 대체 어느 사상이, 혹은 종교가 원론서에서 조차 더럽고 타락한 것들을 긍정했겠는가? 그러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원론적으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나온 사조라 하여도, 이를 신봉한다고 하는 이들이 그 신념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려 하다 보면 이런저런 난관과 모순에 봉착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뒤틀리다 많은 경우 타락해 버리곤 했다.
정치 엘리트들의 타락은 필연적으로 다수 대중들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이때 대중들이 가하는 특정 이념에 대한 비판은,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이념 자체라기보단 그 이념을 신봉한다고 주장하는 '실현자'들의 타락과 모순을 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것은 원론 사상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러한 지적들을 외면한다면 정치 엘리트들을 향한 일반 대중들의 불만 표출 중 상당수가 자연스럽게 배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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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념들은 사실 태생적으로 그 범주가 모호하다. 공산주의의 경우는 처음부터 특정 사상가(마르크스)의 특정 이론서(자본론)에 기반하는 경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정확한 용어 사용의 범주를 정하는 것도 쉽지만(종교로써 기독교나 이슬람도 그러하다.) 파시즘만 하더라도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요컨대 파시즘은 특정 학자에 의해 그 구체적인 틀이 정립되고 실현된 사조가 아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비롯,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무수한 대중정치가들에 의해 우후죽순 발현되어 수십 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제멋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히틀러는 골수 환경주의자였으나(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나치가 생화학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로 꼽힌다.) 오늘날 환경주의는 파시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으로 여겨진다.
만일 파시즘을 연구해 특정 정의를 내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으로 돌아가 파시스트들에게 "당신이 신봉하는 이상이 이런 것이냐?"라고 질문한다면, 많은 경우 "글쎄요?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군요."라는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종종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들과 비교되는 오늘날의 대안 우파들은, 그러나 그 범주의 모호함에 있어 과거의 선조들(파시스트)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어떤 대안 우파들은 사회주의 수준의 복지를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동성애를 긍정하며 어떤 이들은 유대인을 긍정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견해 내지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각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르다.
이들을 꼭 '우파'라고 불러야 하는지 역시 의문이다. 이를테면 대안 우파 현상을 논할 때마다 종종 언급되는 두테르테 대통령이나 오르반 총리는 좌파 출신이다.
이들에겐 정말 '신좌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그켬 한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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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이념 용어는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모호할 수밖에 없다. 좌파 우파라는 용어부터 세계 각지에서 얼마나 중구난방으로 사용되고 있던가?! 고로 나는 정치 사회를 논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암기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주장 속에서 특정 용어가 무슨 맥락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사실 그것이 가능할수록 상대를 논파하기도 더 쉬워진다.(상대를 이해할수록 모순점도 더 잘 보인다.)
마지막으로 어디선가 접한 모 경제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이번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는 나와 경제에 관한 대화를 할 때마다 종종 '도적놈들'을 언급하곤 했습니다. 전 그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죠. 나중에 가서야 그 '도적놈'이 '정부'를 의미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언어의 의미가 끊임없는 사용 속에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