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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Feb 01. 2021

그 페미니즘 비판 1 - 서론

이야기를 시작하며


필자의 글을 읽어왔던 분들이라면, 글 속에서 극우에서 극좌까지 어우르는 다양한 입장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그래, 필자는 다양한 관점들의 놀이터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절대 대변하지 않는 두 가지 입장이 있는데, 나는 페미 피씨충의 입장과 자유시장 만능주의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


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은 무서운 기세로 나라를 뒤 흔들었다. 정치가들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이젠 여성의 아픔에 공감해야 할 때"라는 식의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고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미명 하에 남자들은 여자와 몸을 접하는 건 물론이려니와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꺼려하게 되어갔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 역시 일어났다. 여성에 대한 가해의식이 상대적으로 옅은 포스트민주화세대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과도한 페미니즘 기류에 대한 거센 반발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한계점들 역시 명확한데 사회 지도그룹들로 배제되어 있는 탓인지 페미니즘에 반대하며 구사하는 많은 논조들이 충분히 체계적이지 않다는 게 그중 하나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소위 반페미를 한다는 이들에게 조차) 페미니즘의 주된 논조, “그래도 여자가 더 불쌍자이고 더 피해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여자는 남자에게 특별배려를 받아야 한다.”가 깊게 박혀있음을 접할 때마다 깊은 문제의식을 느끼곤 한다. 


총칼보다 무서운 것이 문화권력을 동원한 사회인식의 주입이다. 

물리 물질적이고 실질적인 힘을 통한 압박은 많은 이들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남기지만 역설적으로 그 고통을 통해 전선을 보다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문화를 통한 조용한 의식 침투는 공격을 받는 대상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공격받고 있음을 인지할 수 조차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위험한 측면이 있다. 소리 없이 조용하게, 상대가 원하는 인식을 주입받는다. 

 


무단통치와 문화통치. 무단 통치하에서의 투쟁은 격렬하지만 문화 통치하에서의 투쟁은 길고 지루하다. 격하지 않게, 하지만 꾸준히 해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도처에서 소리 없이 뿌리내리고 있는 그 페미니즘의 일방적 피해 서사를, 마지막 한 점까지 찾아 치료(??)할 때 까진 말이다. 


자주 해온 이야기지만 원론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전통 가부장 치하에서 남성의 피해 서사와 여성의 피해 서사를 모두 동등하게 다루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부장 치하에서 여성이 피해받았음 못지않게 남성역시 피해받았음을 기성 페미니스트들이 인정해 줄 수 있었다면, 당연히 작금의 젠더갈등 난리통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남녀 모두 평등하게”라는 페미니즘의 모토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페미들은 “그럼에도 굳이 따지자면 여자가 피해자고 남자가 가해자”라는 그들의 오래된 인식 하에 언제나 여성의 힘을 모아 남성을 공격하는 것에만 치중해왔다. 남성에 대한 죄의식을 강요했다. 이것을 막는 방법은 한 가지뿐. 그들이 신줏단지처럼 여기는, “여성 피해자 서사”자체를 하나하나 해체해 들어가야만 한다.  


일전 모 인터넷 언론사에 잠시 소속되어 페미니즘의 가장 주된 기둥이라 할 만한 피해 서사들을 잘근잘근 부수는 동영상들을 만들어 올렸던 적이 있었다(물론 파급력이 그다지 크진 않았지만). 그 동영상들의 내용에 기반해서 이야기를 풀어볼 생각이다.

총 10편으로 예정.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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