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논쟁의 종파
아브라함 계열 계시 종교. 그러니까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하나뿐인 신과 그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수행함에 있어 인간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해서는 아니 된다. 이를테면, 주께서 말씀 하사 "빨간색 옷을 입으라." 하심이면 죽었다 깨나도 뻘건옷을 입어야만 한다.(입으면 죽는다 해도 그냥 입고 죽는 거다.) 애초에 '사람의 이성'에 입각한 옳고 그름 판단을 거의 인정하지 않기에, 신자들은 그저 어버이를 따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신의 말씀을 따라간다.
이에 상극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도가 내지 불가사상이다. 도가나 불가 사상에선 애초에 어떤 '절대적인 올바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은 보는 주체마다 달라 보이는 것이 당연함에, 게 중 어느 누구의 시각이 절대적으로 옳다 말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들 사상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 있다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입장 하나뿐일 것이다. (도가 불가의 이러한 상대주의적 특성은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사조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유교는 좀 모호하다. 일단 유교는 아브라함 계 종교처럼 "어느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가나 불가 사상처럼 완전히 해체된 상대주의를 추구함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산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가르침도 아니다.(이 부분에 있어 유교와 도교는 수천 년 동안 대립했고 이들의 충돌(?)은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 고서들마다 심심찮게 등장한다. 사람들이 그것을 잘 눈치채지 못할 뿐)
그럼 유교는 '무엇을' 숭상하는 가르침인가?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관계'. 바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유교는 사람 간의 정리 교류가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함에 있어 주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유교가 아닌 다른 종파에선 어떤 고결한 가르침을 따름에 있어 사적인 정리가 작동하는 것을 무척 죄악시하곤 했다. 이를테면, 가르침을 따르고자 찾아온 제자가 어버이와의 정리를 그리워함에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일 경우 큰 잘못으로 여겨 꾸지람을 받게 된다.(ex: 예수) 그러나 유교에서는 이런 식의 사적 정리 표출이 용인, 배려된다.
깊은 정리 관계에 있는 사람이 공적인 죄를 범한 경우 이를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유교는 독특하다. 유교가 아닌 다른 가르침들에선 사적인 정리보단 공적 질서를 더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교에서만은 사적 정리에 의한 처신이 용인된다. (유교의 대가들은 공적 질서와 원칙이 과도함에 가족 간에도 서로를 고발하는 상황을 '아름답다.'라고 여기지 않았다.)
유교가 아닌 다른 가르침들은 '사적 정리'가 세상을 이상적인 상태로 이끌어줄 것이라 믿지 않았다. '사적 정리'에 의한 부정부패로 집단이 썩어 들어가고 결국 그렇게 몰락하는 사례가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던가! 그러나 유교의 시각은 좀 달랐다. 세상 어느 누구도 홀로 존재할 수는 없음에, 모든 이들은 어떤 식으로 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이 유교의 세계관이다. 고로 세상 모든 이들이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자기 주변의 사람들부터 따뜻하게 대해주다 보면 결국 온 천하 만민이 따뜻함을 전달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
천자는 제후에게, 제후는 귀족에게, 귀족은 평민들에게 따뜻함을 전달해 나간다.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연결되어있는 이들끼리' 서로에게 충실하면 된다. 고로 유교에선 비록 적이었다 해도, 자신이 엮여있는 관계망 속에서 충분히 충실했던 이들을 충의지사로 치켜세워준다. 조조는 나쁜 놈일지언정 거기에 충심으로 헌신했던 장료나 순욱 같은 이들은 훌륭한 인물이 된다. "자신이 속해있는 관계망 속에서" 충분히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관계망 속 바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충실하다 보면 결국 온 천하가 따뜻함에 충만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의 최고 이상이었다.
유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러한 '정리의 전염(?)'이 세부적인 공적 질서에 막혀 불필요한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천 년이 넘는 동아시아 유교 문명사 속에서 그러한 "유교적 이상"이 너무나도 자주, 손쉽게 망가져왔음 역시도 잘 알고 있다. 유교가 강조했던 "온 천하 만민을 연결하는 정리의 관계망"은 매번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어쩌면 유교의 대가들은 사회의 계급 분화가 심해지면 그 '정리 관계망'의 특정 부분들이 싹둑싹둑 잘려나가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찰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다수의 대중들로부터 유리된 소수의 귀족들은 "자신들끼리만" 서로에게 따뜻하다.
온 천하 만민을 뒤덮어야만 하는 정리의 관계망은 너무나 자주 울타리에 막혀 귀족사회의 바깥으로까지 퍼져나가지 못한다. 조국이나 순실이가 자기 새끼에게 충분히 따뜻했다고 해서 그 따뜻함이 사회 최하층 밑바닥의 천 것들에게 까지 전달되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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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법에 대한 집착"은 유교가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멍애중 하나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유교사상에 있어 예법은 보조 가치일 뿐 절대 중심가치는 아니다. '예'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상하게 하지 않게 해주는 보조적인 장치, 조미료 같은 것일 뿐 절때 본질적인 가치일 수는 없다는 것이 초기 유교 스승들의 가르침이었던 것.
(ex: 안영과 공자의 일화. 예법에 의하면 신하가 임금과 동행할 시 임금이 한 발을 걸을 때 신하는 두 발을 걸을 수 없지만 제나라 재상 안영은 매번 두 발씩 걸었다. 이 부분에 대해 공자의 제자가 문제를 제기하자 안영은 "이건 또 뭔 병신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는 다리가 짧아 임금을 따라잡기 위해선 두 발씩 걸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공자는 안영이 바람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 부분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쓸데없이 복잡한 예법을 줄줄이 깨고 다니는 것이 귀족 식자층의 상징처럼 여겨지면서 귀족사회 속에서 예법에 대한 집착이 패션적으로 과잉된 것은 아닐까 한다. 지금 시대 좀 배웠다 하는 '진보' 지식인들이 PC 스러운 것에 과하게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깨어있음'을 입증받으려 함과 비슷한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피씨스트들을 괜히 '씹선비'라고 그러는 게 아니다. 실제 그들은 서로 많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