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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Nov 25. 2019

르네상스와 동양사상

같은 듯하면서 미묘하게 다른

르네상스 이후부터 서양의 '정신'이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신'으로 대표되는 어떤 거대하고 신성한, 추상적인 무언가로부터 벗어나 속칭 '먹고 싸는' 인간, 너 나 우리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서양 물질문명 그 찬란한 발전의 기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역사를 배운 이라면 누구나 한 번 즘 접해 보았으리라.


그런 관점에서 보면 (중동 이슬람권을 제외하고) 동양 문명은 좀 특이하다. 동양엔 애초부터 '절대적 복종의 대상으로써의' 신(神)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인간의 경조사에 대해 '하늘'을 탓하긴 했지만 그 '하늘'을 기독교식 신의 개념에 대입하기엔 무언가 참 많이 미흡하다. 


만약, '신'으로부터의 해방이 서구인들에게 엄청난 물질적 발전을 가져다준 것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애초부터 (기독교식) 신에게 사로잡혀있지 않았던 동양은 근세 이후 물질적 요소(과학&기술)에 있어 서양만큼 발전하지 못하고 뒤쳐져버린 것일까? 

 

아마 그것은 '인간'에 대한 수용 여부에서 나왔으리라 본다.



구술한 바와 같이 르네상스 이후 서구인들은 각종 욕망을 가진 인간을 그 자체로 긍정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물질적 욕망은 정당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한 투쟁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동양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동양에는 기독교와 같은 '통제자(?)로써'의 인격신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인간의 욕망은 여전히 부정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신으로부터 해방과 자유주의의 발전 이후 서양인들이 마주한 딜레마는, 신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인간이 하고 싶은 것을 다 즐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맛 좋은 음식을 원 없이 먹는 것이건, 성적 판타지를 해소하는 것이건, 무엇이 되었건 욕망을 해소하는 것은 '공짜'가 아니다. 결코 '공짜'가 아닌 욕망에 끝없이 집착하다 보면 결국 사람의 심신이 지치게 된다.(게다가 욕망이라는 것은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역치가 높아지게 된다. 하나의 욕망을 충족한 뒤에 같은 쾌감을 또 얻고자 한다면, 다음엔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할 것이며, 이는 당연히 더 많은 '손실'을 의미한다.)



때문에, 동양인들은 욕망을 가진 존재로써의 인간을 그 자체로 긍정하지 않았다. '참 기쁨'에 이르기 위해, 진정한 자유와 해방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의 욕망은 극복되어야 마땅한 장애물이었던 것이다.(도가나 불가 사상에선 성욕 내지 식욕과 같은 원초적 욕구의 발생 조차도 수행을 통해 제어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물론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인들은 인간이 "원초적 욕구조차도 초월해버린" 형이상적 존재로 재탄생(?)되는 것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진 않았던 듯하다. 많은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탐심을 물리 물질적으로, 보다 '실질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접근방식의 차이가 각각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역시 알고 있다.



18C 근대 이후 서양문명의 압도와 동양 문명의 약세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물론 20C 후반부턴 동양국가들에게서 그 힘의 열세를 극복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열세 극복'의 방식이 상당 부분 서구인들의 '그 방식'과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가상화폐와 첨단무기, 해킹기술과 금융공학, GDP 통계수치 등등에 목매고 있는 이들이 더 이상 "원초적 욕구조차 넘어서 버린 어떤 초월적인 경지"와 같은 것에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자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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