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자들의 병정놀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시리아에선 조금 독특한 방식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 새로운 방식의 전쟁은 보는 이에 따라 더 끔찍할 수도, 더 무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라 하면 정치외교적 논의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는 것에 실패한 두 진영이,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상대방을 격살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했던 바를 이루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시리아에선 (강대국들에 의한) 정치외교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 교전과 피 흘림은, 이 강대국들 간의 정치외교적 합의를 "현장에서 실현시키는 절차"로써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은 어제오늘 형성된 상황인 것도 아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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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현장에는 a, b, c 세 개의 그룹이 있다고 치자.(물론 실제로는 훨씬 많다.) 그리고 이 세 그룹은 각각 강대국 A, B, C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 A, B, C 나라는 종종 즈들끼리 만나서 '무언가'를 '합의'본다.
강대국 간의 '무언가' 합의가 있고 난 뒤, 시리아 현장에선 b그룹이 a그룹의 도시 '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공격 그룹 b는 공격 과정에서 으레 그러했듯이 강대국 B로부터 빵빵한 지원을 받는데 이상하게 a를 지원해 오던 강대국 A는 '가'도시를 방어하는 그룹 a를 지원해주지 않고(혹은 생색내기 수준의 빈약한 수준의 지원) 그들이 고사되도록 방치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현상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강대국 B의 지원을 받는 그룹 b가 '가'도시를 공략하는 동안 강대국 C의 지원을 받는 그룹 c는 그룹 b의 후방 도시 '나'를 공격해 들어온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강대국 B는 이 부분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결국 '나'도시는 손쉽게 그룹 c의 손에 떨어진다.
이 상황 속에서 여러분들은 강대국 A, B, C 간에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를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도시가 누구 수중으로 떨어져야 할지 여부는 이미 강대국들 간의 비밀스러운 장기판 속에서 결정이 나버린 사안이며, 현장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전투는 그저 이러한 강대국 간의 합의를 현실로 구현해주는 일종의 '절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그리고 그러한 '합의'의 영역 밖에선 상호 간의 폭력 분출이 최소한으로 자제, 제어된다.) 대본이 정해진 연극이며, 사람의 피로 쓰이는 한 편의 그럴싸한 서커스이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서커스는 16년 알레포에서, 18년 남부 다라에서, 18년 아프린에서, 그리고 지금 북부 시리아에서 계속 상영되는 중이다.
당신은 이 상황을 무척 역겹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전쟁'은, 현장에서의 피해를 최소화해야만 한다는 강대국 간의 의견 일치 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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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강대국들 간 그 결과가 합의된 전투일 것이라면 그 합의 결과를 피 흘리지 않고 이행할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차피 결과가 합의된 무의미해 보이는 전투'일지라도 그것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강대국들 스스로도 "시리아 전황의 90% 이상을 자기들이 밀실에서 장기판으로 결정하고 있다."라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세상에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보다 슬픈 이야기일 것이다.
한 도시의, 그리고 군소 세력의 운명이 '몰락'으로 이미 '합의'되었다고 해도, 실제 그 도시에 살면서, 그 세력에 몸담고서 땀과 피와 목숨을 바쳐온 현장의 전사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그런 "재수 없고 거만한 파워맨 몇 명의 색연필 장기놀이"따위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여겨짐에도 10% 이내의 확률에 모든 것을 내걸고 무의미한 저항을 지속하려 한다. 전투는 그렇게 진행되고 양측의 사람들은 피를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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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당신은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1. 아무런 규제장치 없이 정말 모든 이들이 사력을 다해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라도 강대국들에 의한 '최소한의 폭력 규제'가 존재하는 현실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2. 이건 그냥 역겨운 꼭두각시놀음일 뿐이다!
+물론 100% 모든 전황이 강대국들에 의해 미리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끼리 합의를 보았는데 현상의 상황이 합의내용과 많이 틀어지면 강대국들도 합의내용을 현장 상황에 따라 '조금씩은' 바꾸는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확률'. 그것이 바로 전사들이 현장에서 피를 흘리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