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을 감추고픈…
'진보'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바람직한'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추구하는 방향성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닌 퇴보라 불러야 할 테니까. 그러나 '진보'가 자신들을 '진보'라 부른다 해서 다른 사람들도 자동적으로 그들을 '바람직한 존재'라고 봐주는 것은 아니다.(이 부분은 오늘날 전 세계 진보세력들의 공통된 고민인 것 같다.)
어떤 정치 지향을 가진 세력이 대중을 상대로 자신들의 존재를 "바람직하다."라고 어필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조건중 하나는 일관성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논지가 언제나 일관되어야 그것의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빨간 옷을 입어야 한다." 그랬다가 또 상황에 따라서 "파란 옷을 입어야 한다."주장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런 이들의 옳고 그름은 논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빨간색 옷을 입어선 안된다."라는 규칙을 가진 사회에서 당신이 빨간 옷을 입어서 처벌을 받았는데 대통령 친구는 빨간 옷을 입어도 처벌받지 않았다면 당신은 애초에 "빨간 옷을 입었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선 "당신은 대통령의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라 말해야 더 정확한 분석(?)이다. 그리고 그러한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자신의 판결 정당성을 주장하기 무척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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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안 우파를 비롯) '진보'의 정당성에 불만을 제기하는 많은 이들로부터 언제나 '일관되게'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는, 스스로 '진보'라고 하는 이들의 언행에 비 일관적인 측면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일부 타락한 진보 엘리트들의 범죄적 행각 정도로 퉁칠만한 부분이 아니다. 오늘날 제1세계의 진보세력들은 사상적 층위에서부터 일관되지 못하다.
68 혁명 이후 '진보'는 다양한 소수자(?) 그룹들을 정치적인 하나로 묶고자 했다. 다양한 그룹들이 '진보'라는 이름 하에 묶이다 보니 양적으로는 성장할 수 있었을는지 몰라도 논리의 일관성은 상당 부분 망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나쁘다면, 이슬람교의 여성 억압적 측면들은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가?
범죄자도 불쌍한 구조의 피해자라 동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면, 여성을 가해한 성범죄자에겐 왜 그러한 도식이 적용될 수 없는가?
흑인이 '약자의 정체성'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들끼리 뭉쳐서 백인을 적대하는 것에 대해 관용적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면, 똑같은 도식으로 '독일 민족의 단결'을 외쳤던 나치즘은 어째서 악마화 되어야 하는가?
등등
양적 성장을 이룰 때마다 이에 비례하여 "답변할 수 없는 문제제기들" 역시도 늘어만 갔다.
이 난처한 지점들에 있어 '진보'가 취해온 반응은 언제나 하나. "우린 더 중요한 대상(우파세력)과의 싸움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자질 구래 하면서도 내부 분열적인 질문들은 다루기 어렵다."(ex: 유시민 조개 발언)
세상에는 다양한 갈등들이 존재하며, 우리는 삶 속에서 많은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게 중 어떤 문제가 더 중요해야 하고 어떤 갈등이 덜 중요해야 하는지를 어째서 '진보 엘리트들'이 결정하려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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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갈등 양상이 지속되는 중이다.
'어떤 진보'는 "반미 반서방이라는 오래된 기조 하에 중국 정부를 응원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다른 진보'는 "일반 대중의 저항은 언제나 숭고하다는 기조 하에 저항세력을 응원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대장 진보'는 모래더미에 대가리를 파묻고 "안 보여! 안 보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라고 외치는 중이다.
(이 새 X 들은 조국 사태 때 머가리 파묻더니만 아직까지도 안 꺼내고 있다.;;)
홍콩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변에서 조개를 줍는 하찮고 한가로운 일"이라 말할 텐가? 이제 68 혁명 이래 지속되어온 주먹구구식 양적 확장에 대해, 그리고 그 결과로 초래된 논리적 파탄들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회의해 볼 때 아닐까? 이 부분에 대한 고찰과 반성, 수정이 없다면 더 이상의 '진보'의 양적 확장 역시도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이 완전히 일관될 수는 없는 법이라고? 그럼 진보가 정의라는 도식도 버려야지ㅇㅇ 일관되지 못한 정의가 정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