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조차도'
사람은 아픔을 겪었다 하여도 공감, 연민해주는 시선이 있을 경우 심적 위안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아픔의 강도를 줄일 수 있다. 고로 같은 고통에 놓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공감&연민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에 따라 사람이 느끼는 아픔의 총무게는 크게 달라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신들이 겪는 아픔을 공감&연민받을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스피커들은 '어떤 종류의 아픔'들을 '신성화'시킨다. 우리는 폭압적 남성의 가부장 압제 속에서 스러져버린 여성의 아픔에 대해 언제나 공감과 연민을 보낼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한다. 주류문화의 폭압에 분노하는 소수 문화의 아픔에 연민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무슬림들이 다른 문화권에서 겪는 혼란과 적응과정에서의 고통들을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범죄를 저지른 불량 청소년들이 사실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그리되었음을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아마 야만인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떤 아픔'들은 스피커들을 통해서 언제나 공감과 연민의 치유를 '보장' 받는다.
그러나 이 도식 밖에서도 고통은 발생된다. 문제는 사회의 스피커가 주로 다루는 '스테레오 타입' 밖에 있는 고통들은 이러한 공감&연민을 받기 힘들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사회의 스피커가 '특정 부류의 고통'을 집중해 다루어주지 못할 경우, 다른 구성원들은 그 고통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다. 스피커들에 의해 익숙해지지 않은 어떤 종류의 고통들은 보통 무시되거나, 심지어 재미있는 구경거리로써 조롱받기까지 한다.
학교폭력을 바라보는 스피커의 관점이 불량 청소년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에 치중될 경우, 피해받는 학생의 고통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경감된다. 피해받는, 소위 '찐따 계급' 아이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즐거운 구경거리이며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 비웃음 속에서 많은 학생 자살이 발생하곤 한다.
남녀 역할 갈등을 다루는 스피커가 오직 '여성 피해자 서사'에만 집중할 때, 야근, 특근에 시달리다 가족으로부터 잊혀지는 가장들, 기러기 아빠들의 고통은 외면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죽음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고통이 위로받지 못하는 상황"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배제되는 아픔은 실로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퀴즈 : 내가 왜 신좌파 스피커들을 증오하게 되었을까요?)
사회의 스피커들이 언제나 사회 속의 모든 아픔들을 다 반영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특정 이념적 의도'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특정 부류의 아픔'을 외면, 배제하려 했다면, 이것은 범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범죄!"
…
생각해볼 일이다. 68 혁명 이래로 반세기가 넘도록 광장의 스피커를 독점한 체 "나는 약자입니다!" "나는 불쌍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연민해야만 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었던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계속 '약자'라고 말해주어야만 하는가?
진짜 약자가 있다면, 사회 어딘가에 정말로 심각한 고통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광장의 스피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 않을까? 진정한 고통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동정 '조차' 받지 못하는, 아마도 그런 고통이 아닐까?
"나는 내 삶이 비극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제 보니 FUCKING COMEDY 였어…."